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2023년 10월 9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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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10장 37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나서 1,1―2,1.11)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길을 나섰다. - 오늘 복음
(루카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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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루카복음
10장 25-37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9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문필정 바실리오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9:4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9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14
📌 강론시작 09:2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9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0:51
📌 미사시작 1:01:30
📌 강론시작 1:12:21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 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율법 교사 한 명을 만나십니다. 대화의 상대가 제자들에서 율법 교사로 바뀝니다. 율법 교사의 등장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이와 관련한 율법 규정이 무엇인지 되물으십니다. 율법 교사는 두 가지 계명을 말합니다. 먼저 인용한 율법 조문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등장하는데,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던 확장된 ‘쉐마’(‘너희는 들어라.’, 신명 6,4-9 참조)의 일부분입니다.
이 계명은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전인적 차원에서 갈림 없이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두 번째 계명으로 레위기 19장 18절이 인용됩니다. 이 계명은 이른바 성결법에(레위 17―26장 참조) 속하는 규범으로서 주님이신 하느님처럼 이웃, 곧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언급한 율법 조문의 유효성을 예수님께서 확실히 증언하십니다(루카 10,28 참조). 이로써 사랑의 이중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규범을 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규범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가르침, 곧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 교사에게 자비로운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임을 배웁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십자가 죽음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인은 어떤 소문을 전달해야 할까요?
소문의 속도는 대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인구 3만 명이 사는 소도시에 깜짝 놀랄만한 소문을 가지고 아침 8시 회사에 출근해 세 사람에게 소문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세 사람은 각자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이 소문을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단계 걸리는 시간이 15분이라고 했을 때, 3만 명이 사는 소도시 전체가 이 소문을 알게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계산을 해보면 간단합니다. 딱 2시간 30분이면 도시 전체의 사람에게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다고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소문은 이론보다도 실제로 더 빠릅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른 전달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메신저(전화, 문자, SNS 등)의 발달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빠르게 전달됩니다. 특히 그 소문이 좋은 소문이 아닌 나쁜 소문이라면 훨씬 더 빠르게 전달됩니다. 소위 ‘아니면 말고’ 식의 ‘카더라’ 통신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과연 어떤 소문을 전달해야 할까요? 나쁜 소문, 가짜 소문이 아니라, 좋은 소문을 그리고 진리를 전달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픔과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드는 내가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소문, 가짜 소문은 나 자신이 아니어도 빠르게 전달됩니다. 그 빠른 속도에 내가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문, 기쁜 소식은 그 속도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나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기쁜 소식을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편이 아니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이기주의가 더 강해지는 요즘에 이 말씀은 우리를 크게 반성하게 합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피하여 달아나는 위선적인 사제나 레위인과는 달리, 오로지 가엾은 마음 하나로 아무런 편견과 조건 없이 애덕을 실천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만 해서 주님의 기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이 점점 줄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좋은 소문, 기쁜 소식이 계속해서 이 세상 안에서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나 제한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모습을 유지하고, 친절한 행동으로 세계를 계속 놀라게 하십시오.
- 마야 안젤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 사랑은 어부의 그물처럼 파견 받은 사랑
세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면서도 가장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단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알면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는 구원에 대해 묻고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눈치챕니다. 골라서 사랑해보겠다는 뜻인데, 그 속내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상대를 이용하겠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려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파견받지 않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500일의 섬머’(2009)는 남녀가 왜 서로 노력하는데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톰은 로스앤젤레스의 소규모 카드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로, 운명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믿는 젊은이입니다. 반면 섬머는 독립적이며 자유분방한 성격의 여성으로,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으로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습니다. 그런 둘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500일 뒤에 헤어졌습니다.
영화는 둘이 헤어지게 된 것이 누구의 탓인지를 묻습니다. 먼저 느닷없이 친구 사이로 지내자고 한 섬머에게 탓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보다 보면 톰도 탓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톰은 섬머의 미온적인 태도에 지쳐갑니다. 함께 잠자리까지 하는 사이지만,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습니다. 섬머는 확신을 주지 않으면서도 노력합니다.
어느 날 헤어짐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술집에서 둘이 술을 마시는데 어떤 잘 생기고 멋진 남성이 섬머에게 치근덕댑니다. 섬머는 계속 싫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처럼 톰은 술만 마십니다. 섬머에게 치근덕대던 남자가 톰을 모욕했을 때 그제야 톰은 그 사람과 싸웁니다. 이 일로 섬머는 헤어지자고 합니다. 톰은 섬머를 구해 주려 한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지 섬머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둘은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섬머는 이제 운명을 믿는 사람처럼 이야기합니다. 둘의 만남은 운명이었지만, 짝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고. 그렇지만 여전히 톰의 손을 놓지 못합니다. 톰은 운명을 거부하며 노력만 하는 그녀와 이별을 선언합니다. 그러며 이젠 섬머처럼 운명의 여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도전합니다.
한 사람은 사랑은 노력하며 성장시키는 것으로 여겼고 한 사람은 먼저 운명이라고 믿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무리는 서로의 연애관이 바뀌며 끝납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을 만날까요? 영원히 쳇바퀴 돌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랑이 파견받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이혼율이 낮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도록 파견받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웃을 찾아 나서려는 율법교사를 사랑하도록 파견하십니다. 파견 받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그 파견한 분을 위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를 잘 키워달라고 파견받습니다. 현대에서는 여성들에게 비난받을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자녀에 대해 남성이 할 수 없는 여성들만의 능력이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만큼이나 자녀의 감정을 알아차릴 감수성이 없고 자녀에게만 집중할 능력도 없습니다. 반면 남편들은 나가서 돈을 버는 데는 여성보다 유리합니다. 본인이 아기를 낳을 일도 없고 감수성이 무뎌서 더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돈을 주며 자녀에게 파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파견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자녀를 키우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외로움을 자녀를 통해 채우려 합니다. 본인은 이유 없이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자녀를 통해 부활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한다면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서운해합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항상 부활을 전제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파견한 이로부터 그 보상과 부활을 추구합니다. 마치 어부에게 던져진 그물처럼 물고기에게 보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물에 대한 보상은 그 그물을 던진 어부가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파견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만 하면 영원한 생명은 공짜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큰 차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마태오복음과 루카 복음 사이에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오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시는 분은 물론 같은 하느님이시지만 어떤 사람은 얻고 어떤 사람은 받는 것인데 어떤 차이입니까?
얻는 것은, 받는 것에 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받는 것은, 얻는 것에 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애써 얻는 것에 비해 받는 것은 가만 있다가 받기만 합니다.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우리 인간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하면 얌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은 얄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애써 얻는 것보다 그저 받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은총이란 완전한 수동태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이란 거저 받는 선물이잖습니까?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부모와 자식 간에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자식은 자기가 잘해야 부모가 사랑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받기 위해 자기는 형제들보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부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심부름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식을 볼 때 부모는 오히려 불편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것도 안 해도 밥을 주는 존재이고, 선행을 안 하고 오히려 나쁜 짓을 해도 밥을 주는 사랑의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믿는다면 애써 받으려는 그런 태도보다는 수동태가 낫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을 주님께서 거시는 것이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사랑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애쓰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편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편지는 받지 않습니다. 싫어하는 이의 편지는 더더욱 받지 않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랑이 좋다고, 당신 사랑을 싫다고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쓸 필요도 없이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쉬운 사랑이 어려워 애를 씁니다.
아직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인데 아무튼, 언젠가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게 되면,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서 이웃과 나누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은 공짜로 주시겠다는 오늘 주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을 알려면 먼저 이웃으로 오신 실천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못난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반성합니다. 소중한 마음을 덮고 있는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시작입니다.
마음을 살리는 것이 곧 생명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이웃을 위한 일이 가장 존귀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일입니다. 자비를 실천한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며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쓰러진 이웃을 도와주고 살리는 길은 이와 같이 복음의 정신과 상통합니다.
폭력을 치유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쓰러지고 넘어진 이웃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 바로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고약한 이웃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쓰러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웃의 손길이 필요함을 압니다.
이웃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복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웃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먼저 선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좋은 이웃입니다. 자비를 나누는 좋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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