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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06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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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10월 6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시편 79,9)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시편 79,9) 성경말씀카드 시편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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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9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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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바룩서 1,15ㄴ-22)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0,13-16)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6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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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루카복음
10장 13-16절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6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강규원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교황님 10월 기도지향 00:25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8:0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6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5:37

📌 강론시작 13:5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6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 성체조배 0:03:40

📌 미사시작 1:03:31

📌 강론시작 1:14:5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행복에 이르는 길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파견되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줍니다. 16절은 파견되는 제자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를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이에 따르면 파견받는 이는 파견하는 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파견하신 분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13절과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역에 속하는 마을들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능력과 기적 행위를 체험한 마을입니다(4,23; 9,10; 7,1 참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행하신 활동을 회고하시면서 회개하지 않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하여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놀라운 행위를 목격하였지만 믿음을 거부하였고, 반면에 예언자들에게 비판을 받아 온 이교도 마을 티로와 시돈의 주민은 참회하면서 변화를 위하여 힘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펼치신 갈릴래아 지역과 이방인 지역 마을의 비교는 이방인 선교를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회개하지 않았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회개하고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단 한 번의 노력이 아니라 계속된 노력이 필요해

 

모차르트는 600여 곡을 작곡했고, 베토벤은 650곡, 바흐는 1,000곡 이상을 작곡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곡이 명곡으로 남아 있을까요? 런던 교향악단이 선정한 세계 50대 고전 음악의 목록에 모차르트 작품은 6곡, 베토벤 작품은 5곡, 바흐의 작품은 3곡만 올라 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들이 쓰는 곡 모두가 명곡은 아니었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1,093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극히 일부만이 우리 삶을 바꿀 발명품이었습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248편의 논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논문 중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고의 천재라고 알려진 사람도 무수한 시도를 했음을 알게 됩니다. 단 한 번의 노력이 아니라, 계속된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 한 번의 기도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계속된 신앙생활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운이 좋기를 바랍니다. 그 운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도 역시 계속된 노력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지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지금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음에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를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이 도시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시지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다른 도시에 비해 상업이 활발한 곳으로, 먹고사는 형편이 나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을 보고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도시에 사는 것을 자기들이 잘 나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티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지역의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은 앞선 세 도시보다 훨씬 더 상업적으로 번성해서 잘 사는 이방인의 도시였지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들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곧바로 회개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당연함은 회개의 노력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한 없는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화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 앤디 워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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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복음의 흐름에 따라 이는 당신이 파견하신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바로 위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고 파견하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인정하는 자를 파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여 파견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분의 인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곧 그분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암행어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데,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됩니다. 성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그 교회를 파견하신 분을 모독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연인과의 사랑,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뉩니다. 이 세 사랑이 각기 그 이유가 다릅니다. 연인과의 사랑은 내가 필요한 것을 상대가 주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피가 자녀에게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형제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파견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안에 부모의 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형제는 부모에게 더는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도 이 현상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만약 부부간의 사랑에서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남편은 돈을 벌지 않고 놀기만 하며 아내는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하고 받은 돈을 낭비하기만 한다면 그 사랑이 오래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관계는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때문인 것은 맞습니다. 자녀가 자기를 부모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갓 잉태되었을 때는 낙태를 해도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자랐을 때 낙태하면 그 죄책감은 그만큼 커집니다. 

자녀가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녀에게 그만큼 자기 피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그만큼 자신의 조각이 되는 것이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됨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피가 그만큼 섞여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자라서 형제가 되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파견받습니다. 피 안에는 부모가 원하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부모가 주었으니 필요한 것을 받으려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지팡이의 힘이 자신만이 아닌 형제를 위해 쓰여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만약 형제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이는 자녀가 부모가 자신에게 준 피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피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 결국 부모는 자기 자신은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형제가 자신을 사랑해주는데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부모는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녀는 파견된 자이고 파견된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녀는 거부당한 부모에게 거부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조각을 품고 파견된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를 파견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죄의 용서의 힘을 가지고 파견된 교회를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펜하이머가 과연 미국의 과학자인지, 아니면 소련의 스파이인지에 대한 갈등을 그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을 위해 일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가 소련의 스파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서 파견받았는지가 너무 중요합니다. 만약 미국만을 위해 일한 오펜하이머가 소련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려 했다면 그 사람이 반역자가 됩니다.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결론지어집니다. 미국은 자기를 위해 일한 오펜하이머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사람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습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한 자의 조각인 피를 지니고 있고 그에 대한 거부가 그를 파견한 자에 대한 거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교회의 딸이어야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경고도 사랑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일흔두 제자의 파견 얘기의 끝에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자들은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소돔보다도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경고에 이어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하시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경고는,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곳 사람들이 불행해지라고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이렇게 살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이고 경고를 통해 그들을 돌아서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고는 주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불행은 경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행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이고, 불행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발작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불행이며 그래서 불행에서 돌아설 기회를 날려 버리는 불행입니다. 

사실 이들은 기적을 보고도 그것을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날려 버린 자들입니다. 

기적마저 그렇게 만든 그들이었니 듣기 싫은 경고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로 그것이요, 경고의 주님을 행복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 인간이 감히 행복을 꿈꾸다니요. 더욱이 신자라면서 하느님 없이 행복을 꿈꾸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마련 바자회를 합니다. 기도와 관심 부탁 드리고, 오셔서 함께해주시기를 또한 청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삶이란 물리침과 받아들임의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리쳐도 늘 우리안에서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의 뜻을 포기해야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나의 뜻을 먼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 또한 하느님을 물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물리치지 않아야 하느님과 함께하는 복음의 시간이 됩니다. 모든 행복의 시작은 예수님을 물리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행복은 받아들임에서 오고 불행은 물리침에서 옵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고 사는 받아들임의 우리들입니다. 

정녕 받아들임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물리침은 자아에 갇힌 행복이기에 참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여기 이곳에서 삶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커져버린 우리 자아를 성찰하는 받아들임의 은총입니다. 

받아들임으로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오늘도 중심 안에서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이 생명의 가장 큰 순리입니다. 생명이 생명이신 하느님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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