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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0/04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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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2023년 10월 4일 (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 9,57)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 9,57) 성경말씀카드 루카복음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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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9장 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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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0월 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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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루카복음
9장 57-62절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4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소개 00:05

📌 교황님 10월 기도지향 01:46

📌 미사시작 02:00

📌 강론시작 10:16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4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4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두 가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9장 57절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라는 표현은,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사건임을 확인하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 담긴 세 이야기의 주제는 ‘따름’입니다. ‘따르다’로 옮길 수 있는 그리스 말 동사 ‘아콜뤼테오’가 이야기마다 쓰여(9,57.59.61 참조)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하시면서 길 위에서 만난 이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에게 주어진 안녕과 평안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편히 쉬실 곳조차 없는 방랑자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일상적 관습에서(1열왕 19,19-21 참조) 벗어나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선택과 헌신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행위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루카 8,19-21 참조) 관계의 변화, 곧 새로운 가족 관계의 설정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발견되는 특이점은 제자가 되고 싶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복음 속 이야기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그분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나요? 오늘 교회가 경축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초대에 응답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따라라 .

 

예전에는 운전해서 낯선 지방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도를 보고서 경로를 미리 확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조수석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시로 지도를 보면서 길을 확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종이 지도를 보지 않습니다. 보험회사에서도 이제 보험 가입할 때 지도를 선물로 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적의 정보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창기에는 검색 속도가 느려서 그냥 종이 지도 보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빠르게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편합니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마 그만큼 내비게이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 불안해하지도 또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비게이션을 신뢰하는 정도는 될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길은 아니라며 자기 편해 보이는 반대편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마음 가는 대로만 살겠다면서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첫 자리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장 정확하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면서 함께하도록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작별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이 정도도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을 가져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긴박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주여, 이제 나의 회상과 고백을 원하시오니 이 마음을 굽어보소서. 그토록 차지던 죽음의 끈끈이에서 빼 주신 내 영혼, 이제 당신께만 붙게 하소서.

- 성 아우구스티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잘못된 선택으로 계속 후회가 된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명의 새로운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견딜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려해보라고 하십니다. 

한 제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상의 시선에 사로잡힌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편의는 물론 세상에서도 완전히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무언가 선택을 하기 전에 꼼꼼히 숙고해보고 결정하라는 내용일까요? 물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많이 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뇌가 피로해지기 때문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압 데익스테르후이스(Ap Dijksterhuis)는 선택에 관한 많은 실험을 통해 복잡한 조건이 많은 선택일수록 오랜 심사숙고가 오히려 많은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결과를 입증하였습니다. 만약 몇 가지 조건만 살펴보면 금방 좋은 차와 나쁜 차를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숙고하는 시간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의 품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 숙고를 많이 할수록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는 확률이 커졌습니다. 다른 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진 것입니다. 반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골라야 했을 경우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도가 컸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이 고려하지 않은 덕분으로 내가 이것을 선택하여 잃게 되는 저것의 장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을 것이라는 편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이득이 있고 잃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한 것도, 학과를 선택한 것도, 직업을 선택한 것도, 배우자를 선택한 것도, 자녀를 더 낳기로 선택한 것도, 덜 낳기로 선택한 것도 후회가 될 수도 있고 잘했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결과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많은 고려를 하고 선택한 경우는 지금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함이 크게 느껴지고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장점들이 크게 여겨져서 선택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왜 이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런 것일 줄 몰랐다!”라고 말합니다. 신중히 고려해보지 않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사제를 선택해서 얻는 행복보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아서 얻을 행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크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었다고 믿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사제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25년 이상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신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게 결심하면 됩니다. 

시인 정호승 씨가 기자 생활을 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 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성격이 완고하여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먹고 설거지가 끝난 후 하수구로 내려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밥풀들을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찍어서 드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려면 부처님께 먼저 1,000배를 해야 했습니다. 또 그분에게 사진을 찍자고 자세를 취해달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호승 씨는 운 좋게도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받았습니다. 해인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백련암 방향을 가던 중 백련암 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사진기를 마구 눌러대는데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그래,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

정호승 씨는 이 말씀이 농담인 줄 알았으나 있는 필름을 다 쓸 때까지도 아무 불평 없이 원하는 포즈를 다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참조: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정호승의 새벽 편지 중)

성철스님은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정호승 씨를 만나겠다고 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을까요? 분명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만나기로 한 순간부터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매사에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마음이 왔는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런 잘못에 후회가 없습니다. 발전하는 기회로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냥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지만, 그 이후로는 해충도 많고 물도 부족하고 만나도 맛이 질리고 고기도 먹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도 자꾸 이집트 쪽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탈출시켜 준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회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신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아버지의 선택 안에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길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던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님 뜻 안에 머물며 주님 안에서는 나의 모든 선택에 후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모든 선택에 있어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하느님 선택안에 머묾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 (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의 가난을 따랐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삶입니다. 청빈한 삶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좋은 형제가 되었습니다. 가난의 선택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선택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가난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요원한 것입니다. 

물질문명의 삭막함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위로하며 채워줍니다. 따스한 피가 흐르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서게 합니다. 가난의 핵심가치는 평화입니다.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은 소중합니다. 청빈은 그래서 비우는 것이며 비우기에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청빈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비워내는 가난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올바른 관계의 실천이 가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난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붙잡지 않는 그래서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도 평화도 가난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가난함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난의 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분명 가난입니다. 가난하기에 숨길 것이 없고 묶여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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