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2023년 10월 8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0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필리피서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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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서 4장 9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5,1-7)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의 집안이다. - 제2독서
(필리피서 4,6-9)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1,33-43)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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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마태오복음
21장 33-43절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0월 8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홍성학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7:2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0월 8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4:14
📌 강론시작 14:51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비유의 의미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에서 논쟁을 벌이시는 상황을(21,23-27 참조) 고려하였을 때,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의미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비난하였으며, 예수님을 정치적 이유로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둘째, 비유는 예수님의 반대자들에게 하느님의 신적 능력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정치적 누명을 쓰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는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예고된 바 있습니다. 제1독서의 포도밭 노래는 정의와 공정, 곧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기대와는 달리, 나쁜 열매로 은유된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열매를 많이 거두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약속된 선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의 빛이 되라.
마크 배터슨(Mark Batterson)이 쓴 ‘올 인(All In)’이라는 책에는 선교사 밀른(A.W.Milne)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앞서 파견했던 선교사 모두를 살해했던 곳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자기 관을 싸 들고 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35년 동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35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가운데에 묻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고 있느냐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또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면 빛이 아닌 어둠을 더 넓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 밀른(A.W.Milne)의 35년 삶을 평가한 원주민들의 평가를 보며, 나의 삶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삶이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겼지만,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없으면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서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모의 명령이라고 위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는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도밭 주인도 또 그의 아들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맡기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지요. 심지어 외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듭니다. 결국 소작인인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을 내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나요? 혹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생각에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던 외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신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감사하는 이만 파견한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성체 기적이 있었습니다. 성체가 종이에 피로 변해서 스며든 것입니다.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감실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체가 그 사람 안에 살아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가 아니기에 성체를 모셔도 그분을 우리 안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렇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못된 소작인들처럼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으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죽이게 됩니다. 소출의 일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 주인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계실 수 없습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자기 원수 같은 후배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에게 주인공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니? 너 지석이 엄마잖아. 애 엄마잖아. 너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아내는 남편에게 파견받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라고. 물론 파견할 때 그 능력도 함께 받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 아내에게 다 가져다줍니다. 파견받음은 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파견을 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생각해 봅시다. 그물은 어부에게 파견받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조금이라도 뜯어지면 어부는 고이 손질합니다. 물고기가 거기로 빠져나갈 수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물이 자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파견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그 파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흐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다 주며 파견하는 남편에게 사형선고 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구약과 신약에서 다 하느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땅 소출의 일부, 곧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받을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파라오의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소출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외아드님도 죽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주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결국 서로를 사랑할 능력도 잃고 주님의 것이 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겐 자부로’의 『사육』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한 일본 산골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와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은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는 덫을 풀어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어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입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감사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그렇게 주님을 내 안에 인질로 잡아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아기 돼지가 엄마를 잃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돼지의 엄마가 되기 위해 코끼리 아줌마가 엄마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돼지는 코가 긴 코끼리 아줌마를 엄마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코끼리 아줌마는 자기 코를 잘라 돼지코로 만들었습니다. 아기 돼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모습과 같은 아줌마를 엄마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기 돼지가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며 파견하신 분께 감사의 봉헌을 조금이라도 드릴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책임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소작인들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종을 보냈다.”
우리는 3주 계속해서 포도밭 비유를 듣습니다. 연중 25주일에는 포도밭에 일찍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늦게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비유를 들었고, 지난주 26주일에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가지 않은 아들과 안 가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의 비유를 들었는데 오늘은 포도밭의 또 다른 비유, 곧 소작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
그러니까 앞의 두 주는 포도밭에 개인으로 가서 일하는 데 비해 이번 주는 개인이 아니라 소작인으로서 일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 포도밭의 단순 노동자/일꾼인가, 소작인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포도밭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작인이란 그야말로 소작인이고 일꾼이나 마찬가지로 소유권자가 아닌데 가끔 소작인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소유권자로 착각하거나 아예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도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소유권 없는 우리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 편 내거로 착각하고 소유하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기업과 하느님의 사업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하느님 기업과 사업을 내 거로 여기는데서 오는 근심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생애 후반에 무척 고뇌하였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냐? 너나, 나냐? 이 수도회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단순 일꾼과 소작인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단순 노동자/일꾼은 하느님의 기업이나 사업에 아무 책임이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는 비해 소작인은 소출의 책임이 있는 존재지요.
그러면 소출의 책임이란 무엇입니까? 책임은 하느님께 지지만 책임의 내용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겁니다. 구약에서 포도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러기에 포도밭의 소출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백성답게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누리며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책임을 다하면 백성이 생명을 누리며 잘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책임지는 것, 이것이 버겁고 그래서 이 책임이 싫습니다. 내 것도 아닌 하느님의 포도밭을 버거운데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그래서 이것이 짐인지, 아니면 영광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짐일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 소작인인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 사랑의 공동경작자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무한 영광일 것입니다. 나를 당신의 파트너 삼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큰 책임을 맡기시다니!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 덕분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보살핌 덕분에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어제 바자회가 끝나기도 전에 피정 동반하러 이곳 제주에 와 있습니다. 오늘 너무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피정 강의 준비를 해야 하기에 새로운 강론을 준비하지 못하고 이전 강론을 올렸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누가 포도밭의 주인인지를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묻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들까지 붙잡아 던져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뿐입니다.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온 정성을 다 바치는 하느님까지 죽이려 합니다. 누가 하느님이지 알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까지 밟고 우리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생명의 주인이 불명한 삶은 언제나 위험하고 위협적입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게됩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필요한 존중의 여정이 하느님 백성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애매모호한 믿음을 반성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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