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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1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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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7월 12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시편 48,11)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시편 48,11)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41,55-57; 42,5-7ㄴ.17-24ㄱ)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 오늘 복음
    (마태오 10,1-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12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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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태오 복음
10장 1-7절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12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지형규 사도 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1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12일 (수)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27

📌 강론시작 15:4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12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9

📌 강론시작 09:0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12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49

📌 미사시작 1:03:01

📌 강론시작 1:13: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흩어진 백성이 다시 모이는 것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희망은 ‘흩어진 백성이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후손이 번창하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계속해서 살지 못합니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근이 심한 탓에 이집트로 가게 되고, 그곳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종살이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 사건이 바로 탈출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에서 긴 시간을 지낸 뒤 다시 약속의 땅, 곧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 임금 이후 왕국은 둘로 나누이고 차례로 이민족에게 점령됩니다.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땅을 잃고 유배 생활을 합니다. 유배는 끝이 났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온전하게 독립하지 못하고 주위 제국들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다시 한데 모아 약속의 땅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이끌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습의 메시아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그분께서 선포하도록 하신 것은 세상의 왕국이 아닌 하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서 이루는 믿는 이들의 나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받아들여야 할 분명한 이유

 

하버드 대학의 실험 중, 청소부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청소부들이 나이가 들수록 혈압이 높아지고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15개의 호텔 방을 청소해야 하므로 운동할 시간이 없어 건강이 좋아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두 호텔 가운데 한 곳의 청소부들을 모아서 그들의 청소 활동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이 청소가 오히려 매일 살이 빠지는 좋은 운동임을 각인시킨 것입니다. 
 
이 설명을 들은 청소부들은 모두 한 달 뒤에 체중과 체지방 비율, 그리고 허리둘레가 줄었습니다. 또 혈압도 떨어지면서 건강 상태가 놀라울 정도 개선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듣지 못했던 다른 호텔의 청소부들은 예전과 똑같았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자기에게 유익한 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가장 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불평불만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자기를 위한 좋은 일이 될 수 있는데도, 무조건 나쁜 일이라고 단정을 지으면 좋은 혜택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늘 우리에게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실제로 필요하고 좋은 것을 차고 넘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뛰어나지 않아 보입니다. 능력과 재주도 부족했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학식이나 훌륭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마 스스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뽑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힘을 얻습니다. 더군다나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는 힘까지 주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도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도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 더군다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추고 있을 때,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면, 자기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의 몸은 정원이고 마음은 정원사다. 게을러서 불모지가 되든, 부지런히 거름을 주어 가꾸든 그것에 대한 권한은 모두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 셰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만은 패망의 선봉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과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주시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습니다. 그는 왜 파멸에 이르렀을까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지만, 더 근원적인 죄는 ‘교만’입니다. 모든 죄의 시작은 교만이고 망하는 이들은 모두 교만 때문에 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나중에 다른 민족들에게 갈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럴 능력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칼은 야채는 자를 수 있지만, 유리는 자르지 못합니다. 반면 보석이 되면 유리도 자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에서 세상을 물들일 수도 있지만, 도리어 세상에 당할 수 있는 수준도 있습니다. 누구나 보석이 되면 좋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복음을 전하러 세상에 파견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가고 누구에게 가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아는 게 겸손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잠언 16,18-19)

몇 달 전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으로 유명했던 주언규 씨가 유튜브 동영상의 표절을 조장하여 자숙하겠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자청’ 채널에 나와서 자신의 일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여 짧은 시간에 100억 재산을 모았다고 하여 여러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왔었습니다. 당시 월 3억을 벌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사임당 채널도 20억에 팔아서 ‘그래도 되는가?’라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구독 버튼을 눌러준 사람들을 그저 고객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현재는 수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청이 그렇게 된 원인을 묻자 주언규 씨가 대답했습니다. 

“오만함!”

그러며 이즈마 마사토의 『부자의 그릇』이란 책 이야기를 합니다. 주언규 씨나 자청 씨나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겪었기에 매우 공감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도 한 은행원이 주먹밥 장사를 작게 시작하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큰돈을 벌면서 결국엔 3억의 빚을 지고 망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돈이 자기 능력인 줄 알고는 사업을 지나치게 확장하다 망합니다. 

자청도 월 3천 벌 때가 있었는데, 포 떼고 차 떼고 하니 결국 한 달에 쓸 수 있는 돈은 50만 원밖에 안 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외제 차 사고 사업을 확장하다가 망한 것입니다. 그의 그릇은 그때 월 3천이 아니라 200~300만 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무리수를 두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만함이고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지금은 무너지지 않을 만큼 계단을 만들며 나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기 그릇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직진하다가는 큰일이 납니다. 저도 많은 강의 요청이 들어오고 책을 낼 때마다 몇 달 만에 거의 만 권씩 팔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럴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조금 천천히 가기로 하였습니다. 유튜브 하며 대신 강의를 줄이고 계속 실력을 쌓아나가려고 합니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장이라는 말씀 다음에 잠언엔 이런 충고가 이어집니다. 

“가난한 이들과 겸허하게 지내는 것이 거만한 자들과 노획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말씀에 유의하는 이는 좋은 것을 얻고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행복해진다.”(잠언 16,20)

결국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과 함께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여 내가 아닌 주님께 의탁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치스러워지면 가난한 이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멘토였던 혜민 스님도 결국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싼 차와 큰 집을 가지면서 결국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이들 안에 머물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해지면 그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함께 하는 이들이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이 많은지, 기도하는 이들인지, 자신만 믿는 이들인지 보면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교만에 빠져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계단은 하나씩 올라갑니다. 뛰다가는 크게 다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릇에 따라 일을 맡기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까운데서부터 차츰 먼곳으로 

 

이스라엘 집안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를 제자들 가운데서 뽑으신 주님께서 이제 그들을 파견하시는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서 가라고 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과연 주님이 하신 말씀인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다면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진심이 아님을.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다른 민족들에게는 파견치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파견하셨을 리 없으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또한 압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복음 선포 방식이요 전략임을. 이스라엘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쓴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스라엘 집안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하느님의 집안이기를 바라지만, 이 집안이 흩어지고 망해가고 있으니 먼저 이 집안의 길 잃은 양을 찾아가라는, 그러니까 먼저 이스라엘 집안을 모으고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가라는 거지요. 

실제로 마태오 복음의 맨 끝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이것은 ‘형제적 공동체’를 주제로 피정하는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공동체의 복음화를, 그다음에 세상의 복음화를 하라는 가르침 말입니다. 

이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라는 가르침과도 같을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할 사람은, 먼저 자기를 닦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처럼 세상을 복음화하기 앞서 자신과 공동체를 복음화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길 잃었다면 나의 성소를 먼저 찾아야 하고, 같이 사는 형제가 길 잃었다면 그의 성소를 찾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실은 나의 성소를 찾는 것이나 형제의 성소를 찾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공동의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공동체도 나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카 복음이 길 잃은 양이라고 하지 않고 잃은 양이라고 한 것도 이 뜻일 겁니다. 그 형제가 길을 잃은 것이 실은 우리가 그 형제를 잃은 것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라고 해서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찾지 않으면 그 한 마리 양만 잃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잃게 될 것입니다. 

백 마리란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 백 마리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공동체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의 성소와 사명을 흔히 파견되어 가는 성소라고 합니다.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치라.”라는 성소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칸들은 교회 밖 이교도들에게 가기 전에 먼저 교회 공동체 안으로 파견되어 갔고, 길 잃고 흩어진 이들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모으러 찾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차츰 먼 곳으로 찾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변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다. 살아 숨 쉬는 진실한 믿음입니다. 진실한 삶은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모으듯 우리의 삶을 끌어안는 지혜입니다. 진실한 삶은 사랑의 지혜와 함께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회개의 길을 주님을 따르면서 절실히 만나게 됩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올바로 보는 것에서 회개는 구체적이 됩니다. 나의 모습을 나의 모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지를 주님을 통해 깨닫고 배우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이 바른 삶의 실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 바로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 매 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소중한 순간들은 무한으로 열려 있습니다. 나와 너를 넘은 우리 모두의 행복은 마음을 열듯 길 잃은 마음들을 헤아리고 끌어안는 믿음입니다. 변하지 않아야 할 인생전체의 믿음이고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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