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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09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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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7월 9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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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즈카르야 9,9-10)
    보라, 너의 임금님이 겸손한 모습으로 너에게 오신다.

  • 제2독서
    (로마서 8,9.11-13)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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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마태오 복음
11장 25-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9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2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9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15

📌 강론시작 17:4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9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00

📌 강론시작 13: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감사드리다’라는 표현은 본래 ‘고백하다’라는 의미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신비를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추고 드러내는 것은 하느님 신비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계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이제 유일한 관계 안에 제자들, 곧 모든 믿는 이도 함께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 유일한 관계를 잘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기도드립니다. 단순한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버지’라는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사람의 입에 담는 것은 피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다가가고, 그분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그분을 알아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하늘 너머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신앙인들도 하느님 아버지와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우리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입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한 시간을 내게 더 늘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정적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가 관건입니다. 문제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입에서는 바쁘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책보고 공부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딜 가봐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지금의 현대인은 하루 평균 2,600번씩 스마트폰을 터치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작 다른 곳에 쓸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지인과 식사하러 식당에 갔는데, 한 아이가 울어대는 것입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너무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니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울음을 멈춥니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에 이 어린아이 역시 빠져있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또 제대로 삶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시간만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이들 모두 하나같이 연락이 잘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지만 무음으로 놓거나 꺼놔서 연결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보다는 세상의 것에 그냥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당신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듯이, 어렵고 힘들 때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뜻에 집중할수록 주님의 위로 안에서 힘을 내어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도 철부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난 사실(예수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감사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될 때, 분명 그분 안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잠깐이라도 아날로그에 가까운 삶을 살아보며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 찾을 필요가 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끄고 진정으로 우리 곁에 사람들을 발견하라.

- 에릭 슈미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뱀의 것이 되거나 예수님의 것이 되거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순결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참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멍에’를 매어 온유하고 겸손해지면 ‘안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곧 행복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복은 고통의 소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데 집착의 대상인 자아가 소멸하거나 그런 존재인 것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해방되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 ‘삼사라’(2004)에서 이 논리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한 스님이 자기 육체의 욕망을 없애고자 몇 년 동안의 고행을 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아 파계하고 남편이 됩니다. 책임이 생기니 돈의 욕심도 생기고, 결국 다른 여자가 좋아져서 결국엔 인간의 고통에 얽매이게 됩니다. 이에 다시 아내를 등지고 절로 돌아가고 싶어 갈등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고통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존에 대한 욕망입니다. 저는 그것이 창세기의 뱀이나 탈출기의 파라오로 봅니다. 뇌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편도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편도체는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문이고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이 있으면 이성의 작용 없이 몸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편도체 활성화를 제어하지 못하면 제어되지 못한 생존 욕구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영화 ‘곤지암’(2016)은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소름 끼치는 장소인 대한민국 공포체험의 성지로 불리는 곤지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공포영화입니다. 유튜브 조회수를 높여 순간적으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젊은 청년들이 곤지암에 있는 폐 정신병원에 잠입하여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을 방영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의 이기심이었습니다. 유튜브 조회수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귀신의 존재가 있는 줄 알면서도 친구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와가 뱀의 종살이를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하였듯이 우리는 ‘나’라는 편도체에 종살이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소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처음에 들어있던 뱀이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뱀을 ‘나’라고 부릅니다. 내가 배고프고 내가 화가 납니다. 그러나 그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뱀이고 편도체입니다. 그런데 문밖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는 나다”(탈출 3,14)라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면 내 안의 나와 대결할 것이 분명합니다. 생존 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먹히는 삶입니다. 마치 편도체와 전두엽의 역할이 그렇게 다른 것처럼 뱀이라는 나와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나는 완전히 반대 욕망을 나에게 제시합니다. 어떤 멍에를 선택하느냐는 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는 인간 안의 뱀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하게 되는데 석가는 그를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가둡니다. 석가는 그에게 벌에서 벗어날 기회를 줍니다.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은 결정해야 합니다. 금고아를 쓰면 자신이 삼장법사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 그 금고아가 자기 머리를 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지 않으면 자아의 종이 되어 원숭이 본능으로 지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는 금고아를 받아들이고 삼장법사와 함께 여정을 떠납니다. 이는 탈출기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곧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지혜로운 것이고 그리스도의 멍에인 십자가를 통해 자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

 

오늘 즈카르야서는 우리의 임금님께서 오시니 기뻐하고 환성 올리라 하는데 그 임금님이 어떻게 오시고 누구에게 오시는지 오늘 연중 제14주일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 임금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왜 그렇게 오시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렇게 오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오시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오시면 많은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데 왜? 그것은 주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긴 하지만 낮은 곳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군림하시고 당신을 과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아지려고 오시고 우리를 고통에서 구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에 대해서 필리비서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는 겸손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겸손의 사랑은 같아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기를 사랑하는 어미의 사랑 같습니다. 어미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 키를 낮춥니다. 아이가 알아듣도록 아이의 말로 말하고 아이의 수준이 됩니다.

이렇게 낮추시고 우리와 같아지시니 우리는 주님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겸손으로 당신을 숨기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당신을 숨기십니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 감추시고, 오히려 고생과 무거운 짐으로 한껏 낮춰진 사람에게만 보이십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같아지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은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누가 이 초대에 응해 가겠습니까? 고생이나 무거운 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은 가지 않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만 가겠지요.

그렇지만 주님께 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간다고 해도 주님께서 짐을 내려주거나 덜어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방식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짐 지시는 방식으로 우리도 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겸손과 온유의 멍에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멍에는 배낭과 같이 짐을 싣기 편하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멍에는 기본적으로는 불편한 것이고, 그나마 덜 불편한 멍에와 더 불편한 멍에가 있을 뿐인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의 멍에는 왜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왜 무거운 짐도 가볍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사람이 짐을 무겁게 지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예 아무런 짐도 지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작은 짐도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은 짐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거운 짐을 질 각오도 되어 있기에 그에게는 어떤 짐도 늘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 짐일 것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지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생각하며 내 십자가를 지면 짐이 가벼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들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철부지들과 어깨동무를 기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우리 영혼을 다시 설레게 합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뜻을 아직 모르기에 아버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뜻이 기도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뜻입니다. 철부지처럼 가까운 하느님과 우리의 편한 관계입니다. 철부지를 가장 좋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철부지를 키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철부지의 말을 이해하시고 들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철부지의 완성은 곧 복음의 완성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기쁘게 화답하는 철부지가 되고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너무 좋아 아버지 하느님만을 따르는 철부지들의 신앙을 저도 따릅니다. 철부지들의 일기(日記)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와 함께하는 참 좋은 주일입니다. 철부지들만 믿는 가장 좋은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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