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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0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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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2023년 7월 7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마태 9,13)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23,1-4.19; 24,1-8.62-67)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9,9-13)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7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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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마태오복음
9장 9-13절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7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영 라파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9:2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7일 (금)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50

📌 강론시작 16:3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7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7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변함없는 자애

 

세리 마태오는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여겨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으로 유다인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소외되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로마를 위한 세금을 거두는 데 대한 반감과, 이방인들과 많이 어울려야 하는 그들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마태오의 동료들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보다 조상들의 전통이나 율법의 구실을 더 존중하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키는 것을 최선의 기준으로 삼던 바리사이들과 빚는 갈등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탁에 앉은 예수님을 못마땅해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이 말씀에서 인용된 말은 호세아서 6장 6절을 참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는 자비 대신 신의로 쓰여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의’로 옮긴 히브리 말은 ‘확고한 사랑’이나 ‘변함없는 자애’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정해진 절차와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봉헌하는 제물보다 당신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느님께 화해의 의미로 제사를 바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소외시키는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계적인 순종에는 지킴과 지키지 않음의 구분만 있을 뿐, 사랑과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는 경험으로도 사랑과 자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따라라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시던 자매님의 체험 수기를 읽었습니다. 이 자매님께서는 이 병동을 방문하면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님께서 곧 운명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이분은 주님 믿기를 계속 거부하셨던 분이라 특별히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꼭 주님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얼마 사시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겁내지 마세요. 자매님 생명을 예수님께 드리면 영원히 살게 될 겁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셨던 이 자매님께서는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당신 같은 사람이면 빨리 만나 뵙고 싶어요.” 
 
‘나’는 예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즉, 나를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닌 나만 세상에 드러내려고 합니다. 나를 통해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니 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증거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도 주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주님의 품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드러낼 수 없는 이유만을 이야기합니다. 능력과 재주가 없어서, 죄 많은 죄인이라서, 시간이 없어서, 언젠가 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향해서도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마태오는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그는 죄 많은 죄인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마태오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불러내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커다란 인재로 만드셨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주님을 따르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의 많고 적음 역시 주님을 따르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모든 것을 다 떠나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마음, 무조건 지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결단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도구로 세상에 주님을 환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서 세상은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때때로 당신이 일하는 곳보다 당신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 마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를 해도 아무 응답도 없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하며 비판하는 이들이 잇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희생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희생 제물이 왜 자신을 자비롭게 하지 못하는지 묵상해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자비롭지 못하여 수백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와 같은 학살자가 또 하나 있습니다.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이었던 스탈린입니다. 스탈린 정권은 강력한 권력 강화, 숙청, 강제 노동, 기근, 대량 학살로 특징지어졌으며, 지금은 통틀어 대숙청 또는 대공포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명 그가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되게 된 데에는 가정사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고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아들과 아내를 구타하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반면 스탈린의 어머니는 스탈린의 초기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우 종교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스탈린이 신부가 되기를 바라며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스탈린은 신학교에 자신과 맞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은 아버지처럼 과격하였고 정치적 전복을 꿈꿨습니다. 결국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고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게 됩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의 투사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이는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해서 신에게 ‘의탁’하는 삶은 맞지 않습니다. 결국 정권을 잡게 되면서 마음에 안 드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처형합니다. 만약 그가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었다면 러시아의 역사는 어땠을까요? 

스탈린의 죽음은 매우 쓸쓸하였습니다. 뇌출혈로 하루 종일 밖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동료들은 그의 방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대처가 늦어졌고 어쩌면 일부러 대처를 늦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치료도 지연된 채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4일 뒤 사망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 동물보다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신학교는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봉헌하면서도 자신을 너무 믿으면 자기를 봉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잔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뱀의 본성은 본래 잔인한데 뱀을 죽여줄 피를 받지 못한 사람은 뱀을 봉헌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커다란 믿음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수도회에 들어와서 종신서원을 앞두고 공황장애까지 올 정도로 몸이 심하게 안 좋아져서 서원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도록 내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분은 한없이 분노하여 집에 가서도 부르짖으며 빨리 건강해져서 서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날 즈음 기도가 들어질 것 같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보통 수도회에서 건강이 안 좋으면 3년 정도 유예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절망과 분노가 컸지만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주님 뜻대로 하세요. 수도자가 되든 말든 주님 뜻대로 하세요. 저는 그저 주님께 저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자 기적처럼 2달 만에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수도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기도를 하기 전까지는 나를 주님께 봉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나에게 봉헌시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주시를 바라며 봉헌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가장 무자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사람의 뇌는 여러 작용을 하지만, 편도체와 전두엽은 그 하는 일이 정반대입니다. 편도체는 생존을 위해 이웃을 두려워하고 이용하게 만들고 전두엽은 이와 반대로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만듭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불안과 두려움으로 정서 질환에 시달리게 되고 전두엽이 활성화되면 관계는 물론 몸도 건강해집니다. 

전두엽은 특별히 내가 의탁할 누군가가 있을 때 활성화됩니다. 의탁할 대상, 곧 부모와 같은 나를 사랑해주고 보호해주는 대상이 옆에 있다고 믿지 못하면 저절로 편도체 활성화 인간이 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바뀔 수 없습니다. 편도체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두엽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다 그러하지만, 특별히 편도체를 안정화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알려주신 ‘자비의 기도’입니다. 자비의 기도 내용은 내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로 나 자신과 세상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내용을 각인시킵니다. 주님의 공로에 나는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주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곧 성령의 은혜에 나 자신을 의탁한다고 끝맺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마치 양 신부님이 기도한 것처럼 주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봉헌하게 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걱정이 사라집니다. 광야에 있지만, 걱정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됩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의탁해야 합니다. 광야의 선 사람만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그러면 다 맡긴 광야의 인간이 됩니다. 광야의 인간만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겸손한 죄인인 우리

 

며칠 전 늘 식당 건너편에 하릴없이 모여 담배 피고 떠들고 하는 조선족 남자들에게 가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오는데 지나가던 동네 어른이 저에게 ‘쟤네들한테 잘해주지 말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데, 그 조금도 잘해주지 말고 냉대하라는 말이지요. 왜 그러는지 말하지 않아도 제가 알지만 그 말을 듣고 제가 ‘그래도 잘해줘야지요.’라고 대답하고는 더 생각했지요.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뭔가? 내가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세운 이유가 뭔가? 내가 <여기 밥상>을 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 조선족 형제들을 포함하여 다 여기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해 나도 여기에 온 것 아닌가? ‘여기’가 지금 내 존재 이유이고 온 이유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설사 여기에 와 있는 이주민들이 아무리 밉상이어도 저는 그들을 위해 왔기에 그들은 제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 존재 이유로 삼은 것은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당신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이런 행위를 못마땅해합니다. 왜 그들을 자기들처럼 냉대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하느냐는 거지요. 이에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게 합니다. 하나는 사랑의 존재 이유입니다. 엄마는 아기가 없으면 엄마도 아닙니다. 스승도 제자가 없으면 스승도 아닙니다. 의사도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아닙니다.  스승은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그를 올바로 이끌 때 훌륭한 스승이고, 의사도 환자가 난치병 환자일수록 그를 고쳐 줄 때 명의라고 하는 법입니다. 

사실 사랑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서 돈만 아는 선생이나 의사라면 말썽꾸러기 학생이나 돈은 안 되고 치료하기 까다로운 환자는 포기하거나 배제할 것입니다. 

사랑할 때 너는 나의 존재 이유이고, 너 없으면 나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욕심의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만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님 말씀이 또 생각게 하는 것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이고 죄인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겸손한 죄인과,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우리 모두를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 겸손한 죄인은 오늘 세리와 죄인들처럼 그 부르심을 따르고, 교만한 죄인은 오늘 바리사이처럼 주님을 비판하고 따르지 않겠지요? 이것을 오늘 묵상하는 겸손한 죄인인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그 어떤 사랑도 대신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병든 이들도 죄인들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병든 이들을 먼저 찾아 나서시는 주님이십니다. 한 번 쓰고 버리시는 하느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있어야 할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 머물 수 있는 사랑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아픈 시간들이 사랑의 시간들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고통과 결합하시는 주심이십니다. 참된 사랑은 죄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병든 죄를 치유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으로 병자도 울고 죄인도 웁니다. 우리의 삶이란 후회와 실패가 아닌 새로운 사랑의 만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새로운 만남이란 서로를 한 몸처럼 여기는 믿음입니다. 이 사랑으로 죄인들끼리 병든 이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었던 판단과 단죄를 이제 멈추게 됩니다. 활짝 벌려 죄인들을 껴안아 주시며 죄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만드시는 하느님의 사랑 구원입니다. 모든 순간이 하느님이 필요한 순간임을 뜨겁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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