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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0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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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2023년 7월 6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시편 116,2)

 

당신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니 나는 한평생 그분을 부르리라. (시편 116,2)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 22,1-19)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오늘 복음
    (마태 9,1-8)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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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마태오 복음
마태 9장 1-8절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6일 (목)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주 카니치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0:0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6일 (목)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38

📌 강론시작 17:3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6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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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6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마르코와 루카 복음서에 견주어 볼 때 마태오가 전하는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두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지붕을 뜯고 병자를 내려보내 치유받는 내용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야기는 중풍 병자의 치유를 배경으로 하지만 주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에 대한 논쟁으로 바뀝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말씀으로 중풍 병자는 낫습니다. 이미 ‘얘야’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중풍 병자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이 낱말이 어른에게 쓰일 때에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이를 선포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것은 누군가를 통하여 선포됩니다. 지금도 고해성사에서 사제의 입으로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 이야기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에 군중은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이런 권한을 부여받습니다(18,18 참조).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 안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요약하는 것처럼, 그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활동하시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치유로써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사람의 아들로 표현되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초등학생 때 심부름을 많이 했었습니다. 막내인 저만 초등학생이고, 형과 누나들은 중학생 이상이라 학교 끝나고 늘 밤늦게 집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거의 모든 심부름을 독차지했습니다. 귀찮고 힘들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는 늘 보상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자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 이렇게 먹을 것으로 보상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보상이 있어도 하기 싫은 심부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석유를 사 오는 일이었습니다. 20리터짜리 들통에 석유를 받아오는 것인데, 어린 제게 20리터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여기에 석유 가게까지의 거리도 상당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서 하기 싫은 심부름이었지만, 이 역시 제가 했습니다. 착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보상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장에서 닭 다리, 닭 날개만 따로 튀겨서 팔았는데, 이것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석유를 받은 다음, 시장에 들러 닭 다리 한 마리를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석유가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기쁨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또 힘이 세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글쎄 석유 들통에 구멍이 나서 계속 석유가 빠져나간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생각에 석유가 새는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인해서 영적인 마음은 빠져나가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빠져나가고, 평화로운 마음이 빠져나갑니다. 주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위로와 기쁨을 얻었는데, 어느 순간 함께 있음이 불편하다면 이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병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모든 병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벌을 받는 중이었기에 치료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당시 시대의 상황을 보셨기에, 겉으로 보이는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힘차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의 반대쪽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 몇 사람은 이를 하느님 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만 보고 있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 안에 영적인 마음이 빠져나가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마음을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서로가 따뜻한 관계로 만날 수 있다면 사는 일이 그다지 고단하지 않을 것이다.

- 박재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죄 사함의 권과 기적의 힘이 하나라고?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치신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병과 죄의 용서를 동시에 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라고 하며, 예수님만이 아닌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인간이 죄를 사해줄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악한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병이 낫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옴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기적의 힘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인정하면서 죄의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기적의 힘을 주시는 분은 죄의 용서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에게 기적의 힘이 주어진다고 믿나요? 그러면 다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우리에게 기적의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 겸손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죄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기적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곧 기적입니다. 

신문 배달, 부두 하역, 탄피 수집, 고물상 등으로 시작해 지금은 커다란 부를 이룬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일궈내는 분들은 믿음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어야 첨벙대면서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조차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게으른 이에겐 가난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부지런한 이에겐 돈이 밀물처럼 밀려온다는 말을 나는 믿어요”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용서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분은 한 해에 60여 명을 서울대에 보내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이기도 합니다. 2010년 도산 위기에 놓인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하여 우리나라 예술계에 커다란 이바지를 하고 있습니다. 한 신문 배달부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또 하나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서울예고는 1987년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막내아들이 학폭으로 목숨을 잃은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인수할 때 가족의 많은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뉴욕 출장 중인데 비서가 전화했어요.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막내 대웅이가 선배들한테 맞다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에 실려 갔다고요. 병원에 전화를 걸어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지요. 그런데 이미 냉동실에 들어간 뒤였어요.”

그는 “가해자 학생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셨다고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학교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했지요. 회사 직원들이 학교로 몰려가 항의하는 바람에 교장 선생님이 도망갈 정도였죠. 그런데 막상 영안실에 평안하게 누워 있는 아이를 보니 눈물만 났어요. 내 죄와 업보가 많아 이렇게 된 건가 싶고. 복수를 한다고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난동을 피우면 아버지가 저러니 아들이 벌을 받았다 할 거고요.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아들을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겁니다.”

담당 검사는 “검사 생활을 18년 넘게 했지만, 자식을 때려죽인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부모는 없었다며 절대 안 된다”라고 했지만, 이대봉 회장은 직접 구명운동을 해서 가해자가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대에 들어가게 도와주었습니다. 이 회장은 이어 아들 이름을 딴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하여, 35년 동안 3만여 명의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지금은 사비를 털어 서울아트센터를 개관하여 한국의 예술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용서의 힘이 복수의 힘을 앞섭니다.”

이대봉 회장은 용서를 위해서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힘은 음식을 먹어야 생기고 운동을 해야 강해집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의 힘도 용서의 힘도 다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분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기적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었으므로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는 이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성당 신부로 있으면 내가 원하는 사목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재정을 많이 할애하게 됩니다. 저는 이번에 첫영성체와 견진 아이들에게 많은 돈을 쓰고 소공동체를 위해서도 많은 재정을 할애하였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의 힘은 하느님 뜻에 더 순종하려고 하는 이에게 더 주어집니다. 이대봉 회장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기 때문에 그 힘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께서 기적의 힘을 주시는 교회에 죄의 용서 권한은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나라에서 무기를 나누어준다면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게 줍니다. 다른 용도로 쓰려는 사람에게는 줄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필요하면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무기를 군인들에게 나누어준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무엇인들 주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죄의 용서의 은혜를 저버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과 맞짱을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이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오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원칙,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원칙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란 모든 복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래서 행복을 원한다면 하느님께 복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내 행복은 내가 농사짓는다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있고 그래서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 순종이 오늘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그 정도의 순종이라면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순종할지 저의 믿음에 대해 생각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해도 자식이 나의 복이고 행복인데 그 봉헌을 요구하는 하느님이라면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분노할 것이고 그래서 불순종할 것입니다. 

나의 행복인 자식을 내놔야 복을 주신다니! 이 말은 내가 움켜쥐고 있는 나의 행복을 내놔야 하느님의 행복이 주어지는 거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의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복이라! 내가 쥐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이라! 

아!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어려운 것을 넘어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서 이런 행복을 구차하게 구걸하느니 차라리 행복을 걷어차고 내 행복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깔 있는 불순종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이런 맞짱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맞짱을 뜨고 깨끗하게 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짱을 떠보지도 않고 승복도 제대로 하지 않을 바엔 맞짱을 뜨는 것이 낫습니다. 

아브라함도 바로 믿고 순종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모리야 땅까지 가는 데 왜 사흘이나 걸렸겠습니까? 이 사흘이란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치열하게 싸웠을 겁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맞짱을 뜨고, 나의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낫습니다. 라고 승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아니라 승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승복의 순종을 하는 데 사흘 걸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저를 생각합니다. 완전히 승복하고 순종하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릴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용기와 용서가 필요한 여정입니다. 자기의 소중함을 회복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또한 용서입니다. 부끄럽고 뉘우치는 마음에서 용기와 용서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기심은 부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끌지만 용서는 평화로 우리를 이끕니다. 

용서가 죽으면 사람도 죽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통하여 살리는 믿음을 다시 배웁니다. 관계를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소중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용기로 오시고 용서로 오시며 못난 우리들의 삶을 잡아 일으켜 세우십니다. 용서는 심판을 멈추는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죄가 사라지면 용서도 사라집니다. 허약한 우리의 모습을 용서로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용서로 돌아갈 우리의 관계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모든 길에는 용기와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굶주린 우리를 용서로 채워주십니다. 

믿음의 길은 용기와 용서로 주님을 향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은 용서를 먹으며 자라납니다. 쓰러진 곳에서 일어나 용서의 제 평상을 가지고 용서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용서아닌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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