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토마스 사도의 축일을 영광스럽게 지내는 저희가 그의 전구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그가 주님으로 고백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3년 7월 3일 (월)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26)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소서 2,19-22)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
20장 24-29절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3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주 카니치오 신부 집전
📌 성 토마스 사도 소개 00:05
📌 교황님 7월 기도 지향 01:30
📌 미사시작 01:45
📌 강론시작 07:4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3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5
📌 강론시작 15:4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3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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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시작 05:05
📌 강론시작 12:2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3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0:48
📌 미사시작 1:00:06
📌 강론시작 1:09:08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최고의 고백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의 일부입니다. 오늘 복음은 동료들의 증언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겠다고는 하였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믿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처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중요한 사도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개인을 넘어 그 당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과 토마스 사도의 대화를 보면 마치 부활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은 이들을 겨눈 말씀처럼 들립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시대를 뛰어넘는 부활 신앙에 대한 초대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의구심을 버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신앙 고백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주님이자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최고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처음으로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했을 때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이었지만,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했고 또 자신도 없어서 마음만 먹고 있었지요. 그러나 더 나이 들어서는 할 수 없겠다 싶어서 30대 중반에 갑곶성지에서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튼튼해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대전까지 갔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면서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무릎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걷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자주 가는 선배 신부님께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의 정형외과에 들어가서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푹 쉬라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시골 읍내에 들어가니 허름한 정형외과가 눈에 보였습니다. 워낙 손님이 없다 보니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진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친절하셨습니다. 이 더운 날 고생한다면서 냉커피도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았습니다. 약사 선생님 역시 이 뜨거운 여름날에 고생한다면서 약값을 깎아주십니다.
자전거 여행 중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곧바로 ‘사람 만난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된 사건들이 자전거 탄 것보다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만남으로 힘든 것도 잊고 목표했던 부산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계속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를 잊게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거부하면서 고통과 시련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불신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는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습니다. 어쩌면 불신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에서 곧바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서,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끊임없이 표징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보다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먼저 해결해달라며 불평불만 속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희망이 되어 자기 신앙을 고백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면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훌륭한 생각, 멋진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 커넬 샌더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두려움은 믿음을 증가시키는 발판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이면 항상 복음은 의심 많은 토마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사도 요한과 같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않고도 쉽게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요한보다는 대부분 토마스와 비슷합니다. 그러니 토마스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래도 믿으려 했습니다. 그가 믿으려 한 것만으로 해서 그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이들은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요? 또 왜 토마스는 어떻게 끝까지 주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인하려 하였을까요? 이는 자신 안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지, 아니면 없다고 믿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자신을 그저 육체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굳이 하느님을 믿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신 안에 영혼과 같은 것이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신적인 존재를 찾으려 합니다. 곧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들만이 육체적인 위협을 넘어 영원한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20달러 지폐의 새 인물이 될 해리엇 터브먼은 1820년대 초 메릴랜드에서 흑인 노예로 태어난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체벌과 가혹한 노동 조건을 견디며 노예 제도의 잔인한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탈출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 포기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그녀에게 길을 보여주십니다. 확신이 생긴 그녀는 혼자 그 길을 따라 탈출하여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에 확신이 생긴 그녀는 편히 지낼 수 있었음에도 13번이나 돌아와 가족들과 700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을 탈출시킵니다. 그래서 그녀를 흑인 모세라 부릅니다. 두려움에 맞서는 동안 믿음도 함께 성장합니다.
한 예로, 노예 그룹을 위한 탈출을 계획하는 동안 터브먼은 그녀에게 앞에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하느님의 환상을 받았습니다. 평범하고 빠른 경로를 택하는 대신 그녀는 그룹을 더 길고 위험한 경로로 이끌었습니다. 그날 밤 원래 경로가 노예 포수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자유로 이끄는 것과 관련된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그녀의 믿음과 기도가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적 인간이 있고 영적 인간이 있습니다. 저희 신학교 때도 귀신을 보기도 하고 그래서 무서워서 잠도 못 자다가 결국 신학교를 나간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육체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육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 쓸모 없습니다. 썩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탄이 두려움으로 우리를 잡아놓으려 한다는 것을 신학교 때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저도 성체조배 하는데 이상한 숨소리를 들었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귀신을 본다는 사람에게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먼저 권고합니다. 기도로 두려움을 이기면 부활한 주님을 만납니다.
토마스는 도망을 쳤어야 맞습니다. 사도 가운데 있으면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는 영혼에 대한 더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면 신앙이 생깁니다.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믿음을 증가시키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의 문 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씨름인 의심
제 생각에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의심의 존재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믿음의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완전한 불신의 존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심이란 불신과 다릅니다. 불신이란 믿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의심이란 믿지만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반신반의가 바로 의심의 정확한 뜻입니다.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반신반의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반신반의의 존재가 인간이지만 다름이 있다면 불신을 선택하고 불신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기로 하고 믿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 사도가 의심의 대명사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음을 고백하였으니 의심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 그는 의심이 불신 쪽으로 쏠렸던 적이 있습니다. 여드레 동안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었고 왜 다른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제자단을 떠난 제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그들처럼 제자단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믿었던 주님이 죽음으로 끝장나자 실망을 넘어 절망하였을 것이고, 주님께 대한 희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니 더 이상 제자단 가운데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단을 떠났던 그가 여드레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돌아와서 한 말을 보면 아직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의심하지만 의심이 불신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고 어떻게든지 믿어야겠다고, 적어도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지는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불신의 그룹에는 속하지 않고 믿음의 그룹에 속하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믿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기로 마음먹고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단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도 반신반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불씨를 끄지 않으려고 서로 의지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불신 쪽에서 믿음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돌아온 것뿐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믿음으로 온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의심은 믿고 싶은 의심이자 믿기 위한 과정의 의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자 의심은 의심을 거치지 않은 믿음보다 더 단단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의심은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였듯이 믿음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씨름이 격렬할수록 믿음은 단련이 되고 단단해지겠지요? 우리도 믿음의 씨름인 의심을 시시하게 하지 말고 대단하게 하면 어떨까요? 토마스 사도의 반만큼이라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십자가를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닌 우리자신의 유일하고 고유한 고백을 듣고싶어 하십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사랑의 근원을 체험하는 만남이 다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임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돌아갈 집이란 십자가라는 사랑의 집입니다. 죽음은 생동감을 지닐 수 없습니다. 살아있기에 체험하는 뜨거운 고백입니다. 넘치는 십자가의 빛입니다. 모든 신앙은 십자가의 상처를 닮았습니다.
상처를 체험으로 돌려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가장 맑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길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아파하고 부딪히며 빚어지는 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다시 만납니다. 상처도 활짝 피어나고 상처도 눈부실 수 있음을 뜨겁게 다시 고백합니다. 사랑이 고백이며 사랑의 고백이 우리의 실천입니다 십자가에 감사하는 사랑의 오늘 이 오늘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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