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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0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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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2023년 7월 2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3주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2열왕 4,8-11.14-16ㄴ)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제2독서
    (로마 6,3-4.8-11)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0,37-42)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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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너희는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마태오 복음
10장 37-42절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2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정우 후고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1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2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57

📌 강론시작 21:1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2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사랑에 대한 응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신 뒤에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과,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일을 알려 주시는 부분이 섞여 있습니다.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말씀은 가장 큰 계명의 첫 부분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22,37). 

어쩌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여야 하는지 묻는 데에 대한 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비교 대상이 됩니다. 실행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비교입니다.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첫째가는 제자의 길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16,24)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초대는 목숨을 잃고 얻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으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은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분을 충실히 따르도록 가르치셨으며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신 생애의 요약과도 같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보여 주신 사랑에 대한 응답과도 같습니다. 신앙인은 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세례는 그 응답의 시작이고, 그 응답은 일상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지속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나온다.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매년 원로 신부님들이 오셔서 고해성사(총고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러 갔다가 엄청나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성사 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나가!!!” 
 
결국 쫓겨나서 다시 성찰한 뒤에 무서워서 그 신부님이 아닌 다른 신부님께 가서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고해소에서 쫓겨난 것이라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성사라는 고해성사를 이렇게 공포 분위기로 만드는 신부님이 잘못이고, 신부님께 문제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즉, 부족한 저를 위해 신부님께서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올해 초, 우리 성당 난간에 한 아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간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사다리 올라가듯이, 난간에 올라가 있던 것이지요. 너무 깜짝 놀라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장 안 내려와!!” 그 아이가 미워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난간 위로 올라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기에 다급하게 큰소리친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상대를 위해 큰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이나 시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니 그분 뜻을 100%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역시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자체이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또 아들이나 딸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우리나라처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때로는 아픔을 동반하고 상처까지 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제2독서를 통해,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밝히십니다.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합당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몸과 마음은 도가 높아질수록 편안해지고 권세가 높아질수록 위태로워진다.

- 사마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님이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당신 예언자들임을 왜 믿어야 하는지 묵상해야 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파견하시면서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시고,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라고 하시며 교회를 받아들여야 교회가 받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죄를 용서해서 주시면 되지 교회를 파견하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로 교회 안에 묻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추운 어느 겨울날, 연료가 소진된 미군의 트럭이 한 다리 위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군인들이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아기를 자기 옷으로 감싸고 죽어있는 한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한 군인이 어머니를 다리 주위의 큰 나무 밑에 묻고 전쟁 후 한 군인이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아기가 청년이 되자 양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들에게 친어머니의 무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날도 아기를 발견한 날처럼 매서운 추위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자기 겉옷을 어머니 무덤에 덮어주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웃을 위해 나의 겉옷을 벗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이고 미군은 교회이며 아들이 우리들입니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죽으셔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다만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고 믿는 사람 곧,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존 오리어리는 어렸을 때 불장난하다가 자신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집을 전소시켰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그것은 너의 선택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지기를 방해하는 유일한 원수는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존 오리어리가 사고를 극복하고 훌륭한 강연가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된 이유는 어머니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방식은 예언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소위 개혁 갈멜회를 만든 인물들입니다. 이전의 수도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철저히 주님 뜻을 따르는 수도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커다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를 위해 물 한 잔을 주는 모습입니다. 과부의 헌금처럼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지만, ‘교회를 위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분명 교회를 예언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부와 권력으로 교회가 타락해 갈 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모범으로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죄를 용서해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를 부정하였습니다. 교회를 받아들임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교회로 가서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비록 잘못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교회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교회 개혁에 힘썼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걱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구원과 직결됨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제 생각에 연중 제13주일의 주제는 ‘받아들임’입니다. 그리고 이 받아들임은 억지로 받아들임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요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물론 단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쓴데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게 받아들인다고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쓴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쓴소리를 해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인다고 자주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쓴소리를 왜 달게 받아들입니까? 그것이 진정 우리에게 약이기 때문입니다. 

약을 먹어야 우리의 몸의 병이 낫는데 미성숙한 어린애는 쓰다고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의정 곧 약에 단 것을 바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어른이라면 쓴소리를 당의정처럼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 쓸지라도 몸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시는 것은 쓴소리뿐이 아닙니다. 죽음과 고통,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실패와 같은 것들도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관건은 어떻게 그것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인데 사랑 특히 하느님 사랑으로 달게 받아들일 수 있고 사랑의 수난이야말로 당의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예언자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별개로 생각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예언자나 가난한 이들을 별개가 아니라 동일시하는 것이며, 예수님 사랑으로 제자들과 예언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하나의 약속을 하십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이들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면 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도 사도들처럼 나의 제자들이라면 뭐든지 달게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라! 죽음을 달게 받아들여 생명을 얻고, 십자가를 기꺼이 짐으로써 영생을 얻고, 주님 사랑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상을 받아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십자가 덕분에 칠월을 맞이하였고 회개 덕분에 거짓을 벗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주신 주님의 덕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삶의 가장 합당한 사랑의 기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기본이 기본을 치유하듯 십자가가 십자가를 치유합니다. 십자가의 가족이 되지않고서는 앞으로 함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 자세이며 전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알아 듣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맛이 사람의 깊은 맛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변화의 참된 시작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자신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람을 끝내 사랑하게 하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비껴갈 수 없기에 껴안고 가야하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모르는 이름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갑니다. 십자가를 지듯 주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임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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