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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30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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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30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시편 145,15)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시편 145,15)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 17,1.9-10.15-22)
    계약의 표지로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라.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 8,1-4)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30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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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마태오복음
8장 1-4절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30일 (금)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한욱 요한 세례자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0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30일 (금)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28

📌 강론시작 16:2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30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42

📌 강론시작 12:1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30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40

📌 미사시작 1:03:33

📌 강론시작 1:14: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니 저를 낫게 하여 주소서.

 

산 위에서의 설교(5—7장)로 드러난 예수님의 특별한 권위는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여러 개의 기적 사건(8—9장)을 거치며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를 통하여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남다른 힘과 권위를 지니신 분이심을 드러내려는 마태오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전합니다. 고대에 나병(악성 피부병)은 치료가 힘들고 전염력도 강하여서 매우 특별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3—14장은 이 병의 증세는 물론이고, 나병 환자라고 선언하고 그를 다루는 방법, 그리고 치유 판정을 받는 공식적인 절차까지도 아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특히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된 생활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매우 놀라운 행동을 보여 주십니다. 손을 내밀어 그 ‘부정한 몸’에 손을 대셨기 때문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칠 능력을 지니신 분께서 굳이 그 몸에 손을 가져다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예수님의 구원 방식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몸소 사람이 되셨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려고 죄인 취급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몸소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오늘은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부정한 사람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였던 나병 환자의 아픔을 손수 어루만져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십니다. 지금 아파하는 모든 이를 어루만져 주고자 하십니다. 그 아픔에서 낫게 되기를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바라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혹시 우리 마음속에 남모를 상처와 아픔이 있다면, 나병 환자처럼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니 저를 낫게 하여 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미래는 예측할 필요가 없다.

 

신학교 합격 소식을 받고 처음으로 교구 신학생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자리가 서품식 성가 연습 때였습니다. 1월에 있는 서품식에 아직 신학교 입학도 정식으로 하지 않았지만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서품식 성가 연습부터 함께 했었습니다. 성가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선배들이 모여와서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그때 한 선배님께서 “그러면 얘네는 몇 년에 서품받는 거야?”라고 하십니다. 이에 “1999년이죠.”라고 다른 선배님께서 대답하자, 또 다른 선배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했는데, 너희는 신부 되자마자 인생 끝이구나.” 
 
당시에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세계사에 기록된 큰 사건들을 계속 예언했었다면서, 인류 멸망의 예언도 맞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야기했었지요.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재 2023년을 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인류가 멸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에 사제서품을 받아 지금까지 신부로 잘살고 있습니다. 지구는 망하지 않았고, 저도 멀쩡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측대로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레짐작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삶이 우리의 마지막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께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당시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혐오의 대상이었고, 더구나 이 병의 치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어떤 단체나 격리 수용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스스로 사람이 있는 곳을 갈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 하는 의무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는 삶,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희망을 둡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었기에, 자신의 병도 깨끗하게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의 시선만 신경 쓰고 있었다면, 주님께 말씀을 드리지도 또 주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미래를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만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 생텍쥐페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면 안 되는 사람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자신을 치유하게 해주시라고 하는 대신,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십니다. 왜 그 이전에는 우리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우리 고통을 덜어주시지 않으실까요? 그분은 원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믿음으로 청하기 전까지는 원하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도와줌은 그렇지 못한 상태의 탓을 자신에게 하는 이들에게만 이익이 됩니다. 도와줌은 자기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만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옳았다면 왜 도움을 받으려고 할까요?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이에게는 도움이 오히려 해가 됩니다. 

‘솔로이스트’(2009)는 실화 기반의 영화입니다. LA타임스 기자 스티브 로페즈는 노숙자 나타니엘 에이어스를 마주칩니다. 시티브에겐 신문 칼럼 소재가 필요했었는데, 나타니엘이 길거리에서 2현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보고는 그의 이야기를 신문에 내고 싶어집니다. 사실 나타니엘은 뉴욕 줄리어드 음대의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환청을 듣게 되고 환청은 두려움을 만들었으며 두려움은 그를 도망쳐 노숙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스티브는 나타니엘을 돕기로 결심하고 주택, 재활 및 적절한 환경에서 음악을 연주할 기회를 확보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나타니엘에게 첼로를 제공해주고 독주회까지 열어줍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에 휘둘린 그는 어렸을 때처럼 도망을 쳐버립니다. 스티브는 정신 치료를 먼저 받지 않으면 그를 돕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그러자 나타니엘은 자기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스티브를 공격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도움을 짓밟고 주는 사람을 물어뜯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들이 개요, 돼지였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움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것입니다. 도움은 그 사람을 더 나은 존재로 올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자기 상태를 부정해야 하는 전제가 요구됩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프랑스 혁명을 가장 잘 이용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교회와 결탁한 군주제에 지친 시민들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를 들고 새로운 제도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진 나폴레옹은 자신의 재능과 업적을 바탕으로 계층을 상승시킬 수 있었습니다. 

1795년 혁명 당시 왕당파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은 시민들의 영웅이 되었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결국 1799년에 그는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프랑스의 최고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이라는 혁명적 이상을 스스로 훼손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프랑스의 황제라고 선언하여 평등과 군주제 폐지라는 혁명적 원칙에 직접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된 계기가 된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했고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들을 배신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다시 가톨릭교회와의 협력의 필요성을 느꼈고 1801년 나폴레옹은 교황과 협약에 서명하여 비록 국가의 통제하에 있지만 가톨릭교회를 프랑스의 종교로 재확립했습니다. 

그와 뜻을 같이했던 많은 사람은 혁명의 세속적 원칙에 대한 배반으로 간주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를 도왔던 모든 이들은 결국 그의 야망에 이용당하고 버려지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자유, 평등, 박애와는 거리가 먼 유럽 전역에 걸친 영토 확장을 위해 수많은 프랑스 국민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야욕 앞에서 모든 도움은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하느님께서 그 귀한 은총을 자기 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은 사람에게 은총이 가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에게 주님은 은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각자가 영광을 향해 계단을 열심히 오르고 있었습니다. 데레사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높은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주님께서 데레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만을 바라보는 그녀를 손으로 들어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해주신 일이고 그 영광은 완전히 주님께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원해도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읍시다. 모든 것이 주님 힘으로 이루어져 주님께 영광이 가기만을 바랍시다. 주님은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 고쳐주시는 선의에 대한 믿음

 

복음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여러 청원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께 치유를 청하는 겁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자기의 치유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압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가 악령 들린 아이의 아비보다 믿음의 수준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 ‘하실 수 있다면’이란 말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돌팔이 의사에게도 할 말이 아니고, 의사 특히 명의에게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없이 무엇 하러 의사에게 오고 어찌 치유를 청한다는 말입니까? 고칠 수 없다면 의사가 아니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에게 가서 물을 것이 아니라 가기 전에 그 의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확신이 선 뒤에 가 청해야 합니다. 

능력의 하느님과 가능성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믿음의 가장 초보이자 기초입니다.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이 사랑과 선의의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확고한 상태에서 왔고,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믿음도 확고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은 어떤 뜻입니까? 주님께 선의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선의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는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 선의에 대한 확신은 있습니다. 다만 선의의 내용이 뭔지 모를 뿐입니다.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며 안 고쳐 주시는 것도 좋은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쳐 주시는 것만 사랑과 선의라고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에 대해 알지는 못하더라도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안 고쳐 주시는 주님의 선의가 고쳐 주시는 선의보다 더 큰 선의라고 믿는 겁니다. 

다만 그것이 왜 더 큰 선의인지 지금은 알 수 없고, 미래 언젠가는 주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런 체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왜 안 들어주셨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주님의 더 큰 선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 주님의 사랑과 선의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믿음과 청원은 내가 원하는 호의를 밝히거나 요구치 않고 그저 주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청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뭘 원하는지 주님께서 되물으시면 그때 내가 원하는 호의를 말씀드려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닦아낼수록 드러나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이 깊어지고 밝아지는 사랑입니다. 깨끗해질수록 하나가 되는 건강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깨끗이 닦아내는 것이 간결한 치유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더럽고 복잡한 것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먼저 닦아주시는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듯 하늘을 보게 됩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볼 수 없고 떠나보내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삶의 치유는 곧 마음의 치유입니다. 사랑의 힘을 알고 믿습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알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몸소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 저의 마음 저의 삶을 모두 내어드립니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깨끗하여 지는 길입니다. 참된 사랑이 시작되는 곳에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삶도 깨끗하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병든 삶을 나누는 것이 깨끗하여지는 맑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깨끗이 낫는 가장 아름다운 치유이며 가장 간절한 기적입니다.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께 오늘 하루를 맡기며 내어드립니다. 여기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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