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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26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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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26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창세기 성경 말씀 카드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창세 12,2)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창세 12,2) 창세기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 12,1-9)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 오늘 복음
    (마태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26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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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마태오 복음
7장 1-5절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26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문재현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26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10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03

📌 강론시작 18:0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6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03

📌 강론시작 07:2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신앙생활은 정착 생활이 아니라 방랑 생활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 가운데 으뜸이자 특별히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계획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바로 그 시작의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으로 개명되기 전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하란에 정착하여 오랜 기간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재물과 가축 수도 그곳에서 많이 늘었을 것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렇게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정착 생활에서 벗어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신앙생활은 정착 생활이 아니라 방랑 생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정된 삶은 그 안락함 속에 우리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법을 점점 잊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우리 신앙의 선조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그분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방랑길에 늘 함께하실 하느님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역동적인 신앙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어느 한곳에만 계속 머무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여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이 나의 진짜 벗인가요?

 

인터넷에서 제가 쓴 글이나 강의했던 영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많은 사람이 보고 있으며, 또 매일 올리고 있는 새벽 묵상 글은 하루에 몇만 명씩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강의를 나가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신부님 잘 알아요. 매일 새벽 묵상 글을 보고 있거든요.” 
 
반갑게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또 사진도 찍지만, 저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분이십니다. 일방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이 경우 상대방은 계속 저를 기억하시겠지만, 어디선가 다시 만나도 저는 기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워낙 많은 분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당 신자 중에서도 제 글을 매일 보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시고 또 성당에서 봉사하시기에 자주 만나서 저도 잘 알게 됩니다. 이 경우 서로 아는 것입니다. 서로가 가까운 친밀감을 느낍니다. 
 
하느님과도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추상적이고 일방적인 앎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우리에 대한 앎은 완벽합니다. 여기에 반해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앎은 거의 무지가 아닐까요? 그냥 ‘사랑이신 분, 구원해 주시는 분’ 정도의 추상적인 앎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기도나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대화를 깊이 또 자주 나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에게 친한 벗으로 잘 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뿐 아니라 일상 삶에서도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진짜 벗인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친한 친구 5명을 적어보십시오. 혹시 주님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로만 벗이라고 하는 우리, 마음 깊숙이에는 벗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친한 벗의 관계라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자주 범하는 남을 심판하는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에 대한 험담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남에 대한 험담은 너무나 쉽게 말하곤 합니다. 이런 자세를 통해서는 주님과 진정한 벗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너무하신다면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4)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하지만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 하는 일은 영원히 남는다.

- 앨버트 파이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복덩이,  행복한 사람

 

오늘은 관상에 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자기 눈의 들보보다 다른 사람 눈의 티를 보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래서 볼 거면 행복을 보자고, 볼 거면 악보다 선을 보자고 그래서 행복 관상이란 것을 하자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볼 것이 많고 큰 것도 많은데 왜 남의 눈의 그 작은 티끌을 봅니까? 남의 눈의 티끌을 빼준다고 하니 사랑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고, 악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자꾸 악에 눈이 갑니다. 그 많은 선을 놔두고 굳이 악에 시선이 갑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선을 소유하려다 악을 본다고 하는데 선만 있기를 바라는데 악이 있으니 악이 더 보이는 겁니다. 

깨끗한 옷인데 거기에 티 하나 묻으면 그 티가 눈에 거슬리며 눈에 거슬리는 그것을 오히려 계속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체 옷에서 티는 99분의 1도 안 되는데 99는 안 보고 1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고, 100% 선을 욕심내다가 1%의 악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왜 내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을 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악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나 잘못을 가리기 위해 남의 죄와 잘못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나의 죄나 잘못보다 남의 죄와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것이고 그의 것보다 내 것이 작으니 괜찮다 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자기 행복에 조금이라도 유익이 됩니까? 전혀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가벼운 병은 잘도 진단하며 고치라고 하면서 자기의 중병은 괜찮다고 하며 병을 고치지 않으려는 것과 같으며,.구렁에 있으면서도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나는 행복한지 행복 관상을 하고, 무엇이 나의 행복에 유익하고 해로운지 유익 관상을 해야 합니다. 

길흉화복 중에서 길은 보고 흉은 보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화를 멀리하고 복을 가까이 두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길이나 길조를 좋아하고 흉과 흉조는 싫어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 짓을 곧잘 하는데 곧 길은 안 보고 흉을 봅니다. 

한자어에서 길(吉)은 좋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뜻하고, 흉(凶)은 흉측하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보기 싫은 것이고 안 좋은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복을 주는 사람 곧 복덩이가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고, 복을 주는 사람이 행복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또한 복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고, 남에게 복을 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줘도 안 받으면 불행한 사람이고 줄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복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요 이웃에게 줄 줄 아는 사람이어서 복덩이이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제대로 믿을 수 없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 가득찬 들보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그것의 정체는 들보였습니다. 마음의 눈을 멀게 한 들보였습니다. 꺼내고 빼내니 소중한 사람이 가깝게 보입니다. 

익숙했던 들보의 삶에서 나와보니 비로소 삶다운 삶을 새로이 만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한꺼풀 벗기니 조각조각 깨어지는 우리의 자아가 있습니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니 하느님 자녀다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용기입니다. 

거짓은 사랑이 아닙니다. 들보를 빼내서도 내려앉지 않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거품과 위선 거짓과 허위를 빼내니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세상이 보입니다. 먼저 나의 들보를 빼내는 하느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눈이 맑아야 마음도 기쁘고 사람도 기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어야 할 맑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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