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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2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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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27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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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2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마태오 복음
7장 6.12-14절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27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배한욱 요한 세례자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5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27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51

📌 강론시작 16:1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7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1

📌 강론시작 07:4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7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04

📌 미사시작 1:03:40

📌 강론시작 1:11:4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서로 사랑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은 황금처럼 빛나는 규율이라고 해서 ‘황금률’로 불립니다. 산상 설교(5―7장)의 주요 부분을 갈무리하는 지점에 나오는 이 말씀은 이전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고(5,17 참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충만한 뜻을 여러 가르침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가르침을 관통하는 근본정신, 곧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황금률로 압축하여 표현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 후반부에 언급되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 다음에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22,39-40 참조). 그렇다면 황금률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남(이웃)이 너희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이웃)에게 하라는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듯 하라는 계명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황금률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 13,10 참조).

남이 나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떠올려 보면, 그 많은 것이 결국 하나의 단어로 모두 수렴되는 듯합니다. ‘사랑’, 우리는 결국 남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을 누군가는 주고 있을 것입니다. 받는 존재로만 머물지 말고 주는 존재도 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상호적인 사랑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제는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줄 차례입니다.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각색하여 보면 어떨까요? 

‘남이 너희를 사랑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을 사랑하여라.’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훗날에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친 다음에는 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열이면 열 모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는 지복직관의 상태가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고 직접 뵙는 것이 과연 행복할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 안에서 보면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주일미사에 오면서도, 미사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시계만 연신 바라보면서 짜증 냅니다. 기도와 묵상을 1시간 하라고 하면, “어떻게 1시간씩이나 기도해요?”라면서 화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사랑 실천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싫고, 주님과 함께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있고 함께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수가 있을까요? 주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는 신앙인을 향해 어떤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더군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교도’ 
 
단순히 십계명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모든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던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울먹이며 떠났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자신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교도가 아닌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길은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문이 좁고 비좁아서 이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를 황금률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자신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을 드러내는 것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고 편한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좋은 길은 남에게 해주는 이타적인 삶에 있었습니다. 그 삶이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주님을 직접 마주 보면서 기뻐하게 될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교회는 성인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의 병원이다.

- 모튼 켈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지치는 이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무기력증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울해지는 번아웃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렇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번아웃이 옵니다. 목표에 도달해도 새로운 목표가 없다면 무기력증이 옵니다. 어쨌든 열심히 살면 그 결과는 우울함과 공허함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살지 말아야 할까요? 

“내일의 죠”라는 유명한 일본 권투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 야부키는 빈민가 출신으로 최고의 권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권투를 사회에 대한 분노를 배출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죠는 부유한 체육관 주인의 딸인 요코 시라키를 만납니다. 요코는 죠를 돈벌이로 생각했지만, 나중엔 개인적인 감정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목숨을 건 세계 타이틀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는 않습니다. 죠도 목표가 있었기에 몸이 좋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결승을 치르고 목숨을 잃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불태웠어. 새하얗게.”

세상은 목적을 정하고 달리라고 말합니다. 뒤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황금률이 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황금률은 사랑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해주는 것처럼 나도 상대에게 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생기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이러한 계약입니다. 사랑이 끊임없이 의무를 만들어내고 그 의무가 우리를 지치지 않게 만듭니다. 

영화 ‘록키’(1976)는 필라델피아 빈민가에 사는 무식한 생계형 지하 권투 록키 발보아의 인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사채업자의 수행원으로 살지만, 마음씨는 착합니다. 하지만 혼자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도 벅찹니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수줍은 여동생인 애완동물 가게 점원 아드리안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은 잔인한 복싱 세계와 강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느 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는 자신의 계획된 상대가 다쳤기 때문에 홍보용으로 미지의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크리드는 단순히 ‘이탈리안 종마’라는 별명을 좋아하기 때문에 록키를 선택합니다.

일생일대의 기회에 직면한 록키는 이 샷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록키는 그가 세계 챔피언에 맞설 능력이 없음을 압니다. 그의 목표는 크리드를 상대로 15라운드를 버티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아드리안에게 합니다. 자신이 끈기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실력 차이로 많이 맞지만, 록키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쓰러져도 불굴의 투지로 다시 일어나며 크리드와 정면으로 맞섭니다. 잔인한 15라운드를 견뎌내며 자신이 바라던 대로 끝까지 갑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필라델피아 거리의 부랑자가 아니라 인내, 힘 및 존엄성을 가진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군중이 환호하는 동안 점수가 발표됩니다. 거의 이길 수도 있는 점수였지만, 8:7로 크리드가 승리합니다. 여기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록키는 점수와 승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드리안에게 약속한 것을 이뤄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아드리안이었습니다. 심판이 점수를 부르는 동안 계속 “아드리안”을 부릅니다. 둘은 부둥켜안고 사랑을 확인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세계 챔피언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었기에 점수에 신경 쓸 텐데 록키는 사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를 존엄한 사람으로 증명하게 만들고 오직 사랑만이 결과에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지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는 아드리안에게 받고자 하는 존경을 아드리안에게 약속한 것을 지켜내며 존중해줍니다. 받고자 하는 대로 주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한다면 무기력증이나 번아웃에 빠지지 않습니다. 황금률이 삶이 에너지가 되게 하는데, 그 황금률은 사랑할 대상이 있을 때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께 받고 싶은 것 때문에 나도 드려야 하는 그 의무감, 이 황금률이 사랑의 결과이고 그 결과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이 목적이 되기 때문에 다른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그 결과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마리지 않는 사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마르지 않는 사랑의 대상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황금률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싸우겠지만, 영원히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늘 길,  좁은 길,  생명의 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생명의 문은 왜 좁고 멸망의 문을 왜 넓을까요?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은 많은 사람이 못 들어오도록 하느님께서 일부러 좁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기를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셨고,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듯 십사만사천 명만 정원으로 정하셨기에 좁은 걸까요? 

그렇다면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이 좁은 것이고 하느님 사랑의 품이 비좁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성심성월을 지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하해와 같다는 것이고, 주님께서도 하늘에는 있을 곳이 많으며 당신은 제자들과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려고 먼저 하늘에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이 좁은 것은, 그 문이 하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문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넓은 길이고 넓은 문이지만 하늘로 오르는 길과 문은 산을 오르듯이 올라야 하기에 싫고 힘들고 좁습니다. 

시편에서 이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이 세상 길은 자기 욕심대로 가고, 가고 싶은 대로 가기에 편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지만 하늘길은 손도 마음도 깨끗하고 정신을 오로지 길 가는 데만 써야 하기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같이 가자고 초대하시고, 당신을 따라오면 혼자서는 가기 어려워도 갈 수 있다고 부르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하늘에서 굳이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그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인데 문제는 그 길이 꽃길이 아니고 십자가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꽃길이라 즐기며 노니다가 하늘에 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하늘길을 가시밭길, 십자가 길로 만드시고 그래서 그 길 빨리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 아닌가 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 억지춘향인가요? 억지춘향일지라도 하느님 사랑을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오늘 저입니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소중한 것은 소중한 것을 알아보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소중함의 여정입니다. 소중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 필요했던 우리의 여정입니다. 소중함의 문(門)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알아보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진주가 빛나는 것은 진주를 알아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주어야 할 것도 빛나는 진주의 마음입니다. 진주가 되었기에 진주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린 시간이 진주가 됩니다. 소중한 것은 던지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햇살을 받듯 은총을 받고 축복을 빋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품어안으면 꽃이 되고 진주가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주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서로를 더럽히는 돼지같은 만남이 아니라 서로를 아름답게 하는 진주같은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소중한 것은 소중한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되고 빛이 됩니다. 서로에게 빛이 되는 소중한 사랑의 복음입니다. 진주같이 영롱한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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