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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25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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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고 모인 사람들을 지켜 주시니 남북으로 갈라진 저희 민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시고 흩어진 가족들이 한데 모여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25일 (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콜로새서 성경 말씀 카드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이니, 무엇보다 사랑을 입어라. (콜로 3,14)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이니, 무엇보다 사랑을 입어라. (콜로 3,14) 콜로새서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25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빛, 온 세상에 퍼져 있어도 갈라지지 않으리라.

 

 

마태오 복음
18장 19ㄴ-22절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25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0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25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7시)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58

📌 강론시작 17:4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5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6

📌 강론시작 08:5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한국 교회는 전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남측과 북측이 휴전에 합의한 지도 어느덧 칠십 년이 훌쩍 지나 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적으로 여겨 총을 겨눈 세월이 이토록 길게 이어져 오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남북 정상이 만나 한반도 평화의 해법을 찾아가며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화해의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고, 지금은 언제 그러하였냐는 듯이 더 강한 수위로 서로 위협하고 비방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반목과 대립이 계속되는 슬픈 역사에 우리는 언제 마침표를 찍게 될까요?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남기신 인사는 다름 아닌 평화의 인사입니다. 산란하던 제자들 마음에 평화를 빌어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불안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평화의 해법을 제시하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가진 증오와 원망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합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주문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기도하기를 주문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내려놓고, 서로를 더 깊이 용서하고, 서로 일치를 이루고자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일들입니다. 

물론 칠십 년 동안 쌓여 온 서로에 대한 깊은 불신과 갈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언젠가는 그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기 키우면서 언제 제일 기쁘셨어요?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의 부모에게 “아기 키우면서 언제 제일 기쁘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요? “걸음마 할 때요.”라고 대답하더군요. 다른 부모도 이때가 정말 기뻤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제 같이 걸으며 어디를 갈 수도 있고, 아이가 이제 컸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고 하십니다. 
 
걸음마는 빠르면 7~8개월째, 늦으면 돌이 지나서 걷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을 걸음마를 할 때, 성인처럼 잘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는다고 “바보야! 그것도 못 걸어?” 하면서 야단치지 않습니다. 걷는 시도하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려고 하면 부모는 큰 걱정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걷다가 넘어지더라도 계속 시도하는 노력 자체를 기뻐하는 부모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된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 먹는 과자를 너무 먹고 싶어서 어머니 지갑에서 몰래 20원을 꺼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죄책감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께서 가계부를 쓰면서 “돈이 비는데….”라며 계속 돈 세시는 모습을 보고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미사에 갔는데, 마침 신부님께서 불붙은 지옥 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돈 훔쳤던 일로 곧바로 지옥 불에 떨어질 것 같아서 미사 내내 울고 어머니께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 한 번으로 우리를 불붙는 지옥 불로 이끄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이끄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문제는 하느님 뜻을 따르려 하지 않는 우리의 나태함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대로 살려는 고집스러움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하느님께서는 걱정하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을 기억하면서,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자고 교회는 권합니다. 그러나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도를 멈추려고 합니다. 이제는 함께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면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입니다. 미움으로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는 나태함과 고집스러움을 버리고, 대신 하느님 뜻에 맞게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주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형제가 그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

- 성 예로니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통일을 원하면 북한에 도움을 청하라.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왜 큰 비용을 들이며 이념도 다른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이들과 참아가며 살아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결혼과 아기를 낳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왜 그런 고통을 분담하며 결혼해야 하고 아기를 키워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그런 일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일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이 반은 맞는 복음이지만, 동시에 반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내가 용서해 주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둘이 화해가 이루어질까요? 화해는 쌍방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조건 손해 보고 상대는 무조건 용서받는 식의 화해는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부분 “통일하면 너희가 얼마나 좋은 줄 알아?”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는 자유도 없고, 돈도 없고, 종교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내가 도와줘야 해!”라고 하면 상대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런데 참 행복은 돈과 명예나 성공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자존심만 남습니다. 그 자존심이 우리 통일을 저해하게 할 것입니다. 

‘스탠리 밀그램’은 상황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을 수도 있는 정도까지 전기충격을 가하게 하는 유명한 실험을 한 심리학자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누구나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고는, 무조건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을 시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무조건 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보다 두 배 정도나 높았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 중의 68%가 자리를 양보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실험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이 다시는 그런 실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 상처들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밀그램이 직접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청해보았습니다. 물론 70% 정도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는 순간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굶을 수도 있고 죽음까지 받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내가 더 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상대의 자존심을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가스라이팅’, 곧 심리적인 지배를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쓰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밥을 먹여 주고 양치질과 세수를 시켜 주고 학교까지 바래다준다면, 지금이야 엄마가 그렇게 하게 허락하겠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의 탓을 엄마에게 돌릴 것입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부담스럽게 만들어 상대를 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한 번은 적십자에서 일을 하는 유럽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과 한국으로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북한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맑고 밝고 웃음기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지하철에서 그는 웃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못 봤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통일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준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관계는 언제나 갑을 관계이지 친구가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처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저출산율과 경제성장률 둔화 때문에 어쩌면 유일한 돌파구가 통일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더 필요로 하니 북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독히도 미워하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그 상대가 자신이 읽고 싶은 귀한 책을 한 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좀 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순순히 책을 빌려주었고 프랭클린은 잘 읽고는 너무 좋은 책이라는 감사와 함께 돌려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북한과 우리 가족, 그리고 모든 이웃에게 나아가야 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겸손입니다. 친구가 되려면 도움을 청하십시오. 많은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미사를 드리는 오늘, 저는 우리나라 현실을 보며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와 관련하여 현 정부는 폭주 기관차 같고, 우리 교회와 국민은 기도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현 정부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고 화해와 일치와 반대되는 길을 가는 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를 형제가 아니라 원수로 생각하는 것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형제를 원수로 여기면 부모는 그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용서와 화해가 쉽지 않더라도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고,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우리는 남북의 관계도 성찰해야 합니다. 

북한과 남한은 우리인가? 우리가 아닌 남인가? 하느님 아버지는 북한과 남한의 아버지인가? 남한만의 아버지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드릴 때 우리는 북한은 배제하고 기도 드리는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할 때 북한에게는 주지 마시고 우리에게만 주시라고 기도 드리는 것은 아닌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할 때 북한은 예외인가? 

진정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이의 아버지이고,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버지는 북한의 우리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라고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겼던 일본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라고 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북한에 대해서도 그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의 과거 잘못을 묻지 않고 미래지향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북한과는 더더욱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라면 저처럼 주님의 기도를 바꿔 바치는 것도 좋을 것이고, 그런 뜻에서 제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소개하며 오늘 나눔을 마치고자 합니다.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그들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외면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그들을 악으로 보는 악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발상(發想)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아닙니다. 포기할 수 없는 기도의 길입니다. 끊임없는 봉헌의 길입니다.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건없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상호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화해가 참된 화해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기도의 실천입니다. 실천만이 이 땅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진리는 어렵고 힘든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방이 아닌 힘과 지혜를 기도로 모으는 것입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기도의 회복입니다. 기도는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오해와 편견 모든 모순과 왜곡과 배척을 바로잡는 것이 하나되는 여정입니다. 하나됨의 실천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생과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서로의 얼굴에서 화해와 일치의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올려드리는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드리는 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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