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알렐루야.
하느님, 이 백성이 영혼의 젊음을 되찾아 끊임없이 즐거워하게 하시니 저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바라며 기다리게 하소서.
2023년 4월 23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3주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루카 24,32 참조)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2,14.22ㄴ-33)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 제2독서
(베드로1서 1,17-21)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4,13-35)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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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복음
루카 24장 13-35절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23일 (일)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7:5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23일 (일)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18
📌 강론시작 20:03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3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42
📌 강론시작 16:59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수난과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에 관한 이야기를 부활 제3주일의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루카가 전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를 듣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부활 증인’입니다.
주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날에(24,1-12 참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걸어갔던 그 길은 ‘그릇된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어야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장소로,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터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입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시고 나란히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때는 그분께서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올바른 길’로 돌아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피하려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걷는 길 위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수난과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그릇된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 중에서 어떤 폭력이 더 무서울까요?
폭력은 신체적 폭력도 있지만 정신적 폭력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폭력이 더 무서울까요? 사실 뇌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인간관계에서 거절당하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둘 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먹으면 이별의 고통이나 왕따로 인한 괴로움도 훨씬 완화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적 폭력도 신체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 폭력으로 인간관계가 깨질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이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을 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큰 아픔을 주었다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지 않습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아픔과 상처를 주신 것처럼 책임을 몰면서 주님을 믿지 않으며 멀리하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과연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해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침통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고향 엠마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루카 24,18)라고 말하면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만이 예수님을 경멸하기 위해 쓰던 호칭이었지요. 그만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며 고향 엠마오로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60스타디온을 함께 걸었습니다. 스타디온은 그리스식 길이 단위로 계산하면 약 11.5km 정도입니다. 걸어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지요. 두 시간 동안이나 함께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시간을 믿음이 굳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주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라면 즉,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다면 그 폭력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 생텍쥐페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상할 수 없으면 믿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미사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를 설명해 놓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라고 하는 것처럼 말씀이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길에서 말씀을 설명해주시는 이유는 이미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를 준비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이해의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주님을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믿게 하도록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예상’하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예상하지 못하여 어머니도 못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머리숱이 거의 없으십니다. 그런데 그날은 처음으로 가발을 쓰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어디서 많이 본 아줌마로 생각했습니다. 가발을 벗으셨을 때야 비로소 어머니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제자들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머리카락이 다시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가발이란 것이 있음을 알아야 어머니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들도 부활을 믿을 수 있어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상하게 만드는 일을 성경 말씀이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순종을 통한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죽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쳐야 하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랬더니 축복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다 이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죽음과 부활을 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하인을 보냈을 때 하인은 어떤 방법으로 신붓감을 알아보려 했을까요? 그가 주님께 자신이 물을 청할 때 자신과 자기 낙타들에게도 자발적으로 물을 주는 여인이 자신이 찾는 여인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창세 24,14 참조). 이사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리스도를 만나 한 몸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은 이렇게 말씀으로 이미 착해진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한 이들은 진정 착해집니다. 죽음과 부활을 살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봐야 이해됩니다.
부산교구 김홍석 신부가 용호 성당 보좌로 있을 때 병자성사를 위해 폐암 말기 환자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환자는 성체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성체를 영하는 순간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렸습니다. 김 신부는 영대로 가래가 묻은 성체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다가 그것이 예수님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영했습니다. 성체를 영한 후 심한 고열과 함께 24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는데, 그때까지 290 이하로 떨어져 보지 못한 혈당 수치가 100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출처: ‘요나 신부의 서랍 속 이야기; 예수님께 받은 100점!’, 생활성서사 2016년 4월호]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드디어 성경을 실천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나그네를 잘 맞아들여 집 안에 축복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은 이웃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게 만들어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 드리기 위해 먼저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종해 봅시다. 그러면 그 선악과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생명나무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동행
오늘 엠마우스 얘기를 묵상하자니 주님께서 드셨던 백 마리 양 비유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바로 비유의 잃은 양이라고 연결이 되었던 것이지요.
엠마오 두 제자는 왜 엠마오로 갔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단 곧 주님의 공동체서 이탈하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제자를 ‘제멋대로 이탈한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진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주님의 공동체에서 이탈했겠습니까?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저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제자들의 배에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풍파를 만난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신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공동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와 같이 살던 자매가 공동체를 떠난다면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떠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 공동체에도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강하게 반문합니다. 언제나 어디나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공동체에 안 계신다니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에는 죽어 계신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드려도 그분을 우리 공동체에 모셔 들이지 않기에, 매일 기도를 드려도 그분 말씀을 우리가 공동으로 듣지 않기에 죽어 계십니다.
그리고 매일 예물을 바쳐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예물을 바치기에, 매일 성체를 모실 때 주님은 모셔도 형제는 받아들이지 않기에, 매일 주님의 몸인 빵을 먹어도 그 빵을 형제와 나누어 먹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형제를 내친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의 잘못도 있지만 개인의 잘못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엄연히 살아계시는데도 주님을 보지 못한 잘못입니다. 욕심과 절망에 눈이 멀어 우리 형제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공동체에서 이탈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동행하시며 그들의 말을 경청도 하시고, 공감도 해주시며 가르쳐주십니다. 그랬더니 떠난 형제들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입니다. 감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떠나려는 형제자매에게 할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 이것을 먼저 해준 뒤에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며 설득해야 합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설득, 이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런데 다가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가가야 그다음 것들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가가려는 마음 곧 사랑과 경우에 따라 용기도 있어야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떠나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거나 보고 안타까운 마음은커녕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떠나려는 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떠날 테면 떠나라는 그런 마음이면 결코, 다가가지 않겠지요.
또 사랑의 마음이 있어도 다가감을 그가 거부할까 봐 못 다가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 사랑에는 용기도 있어야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갔으니 그다음은 무식하게 바로 설득하여 성급히 돌려세우려 들지 말고 천천히 그의 길을 같이 걸어주며 그의 말을 듣는 것부터 하고 동감해주는 것에 진심이어야 하고 설득은 나중입니다. 하이라이트는 그러나 빵을 같이 나눔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빵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멋진 식당이나 술집에 데려가서 음식이나 술을 같이 마실 수도 있고,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같이 먹고 마시면 더 감동적이어서 그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의 말씀의 전례와 빵을 나누는 성찬례가 이런 것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믿음도 때론 기대와 실망으로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간절한 기도의 따뜻한 시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끄러운 우리 믿음입니다. 실의와 절망으로 떠나는 이들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무너진 마음 낙담의 마음에 다시 용기를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말씀 밖의 일들이 말씀이 되어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만남과 떠남이 교차하는 거기에서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기도도 마음도 주인을 찾고 만나야 생기와 활기를 얻습니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정녕 예수님의 참된 부활로 가능합니다.
아낌없는 초대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아름다운 나눔입니다. 부활의 주인인 줄 알고 살았던 지난 시간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빵을 쪼개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르던 시간이 감사와 사랑의 시간이 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갑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부활의 기쁨이 되듯 기쁜 주일 되십시오. 가까이 오시고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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