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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19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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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주님, 성자의 부활로 인간의 존엄을 다시 찾아 주시고 저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으니 저희가 해마다 믿음으로 거행하는 신비를 사랑으로 깨닫고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4월 19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시편 34,7)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시편 34,7)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5,17-26)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3,16-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9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복음
요한 3장 16-21절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9일 (수)
이나라 사무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9일 (수)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45

📌 강론시작 14:4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9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8

📌 강론시작 09:03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9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02

📌 미사시작 1:00:57

📌 강론시작 1:09: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파견하신 이유

 

오늘 복음은 니코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어제 복음에 이어집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주제는 오늘과 어제의 복음을 잇는 다리가 됩니다. 그러나 어제 복음에서 ‘들어 올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으로 이루어진 구원이 언급되었다면, 오늘 복음에서 구원은 외아들을 파견한 결과로 소개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저술된 시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하느님에게서 분리되고 단절된 곳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거짓과 어두움, 육과 죽음은 세상을 지배하는 실체와 세력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머무르고 악마가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세상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반영된 이원론적 사고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외아들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이자(1,3 참조),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고, 세상은 다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세상을,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를 결합시키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거짓과 잘못을 저지르며, 마지막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몸소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도가 어려운 이유

 

종종 기도가 너무 어렵다는 분을 만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도 힘든데, 평상시에 시간을 내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힘든 일일까요? 물론 기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도 얻고, 자기 삶을 정리할 수 있어서 분명히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도하기까지가 너무 힘들다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정의하지요. 아주 친한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절친’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만났고,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까?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고서 ‘절친’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계속 만나고 대화해야지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사를 한 뒤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양치질을 하실 것입니다. 원래 인류는 양치질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양치질한 지는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양치질합니다. 양치질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본인이 찝찝해서 못 견딥니다. 하다못해 껌이라도 씹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습관이 되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양치질이 인간 치아 건강에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우리 삶에 기도는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습관적이라도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을 만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하십니다(요한 3,16 참조). 따라서 주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데 집중하는 습관이 가장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습관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라고 하십니다. 빛이신 주님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둠의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 어둠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빛으로 나아가면서 주님의 뜻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습관을 나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양치질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기도와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

- 에디 리켄베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빛인지 어둠인지 아는 방법

 

요한복음 3장은 구원의 원리 전반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기적과 표징은 그저 예수님께로 이끄는 방향 판과 같았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을 통해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있는데 그분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분과 함께 죽이고 그분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제까지 내용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죄의 결과로 아드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결국 지옥에 갈 운명이었지만, 그중에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행실이 좋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나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미 “진리를 실천하는 이가 빛으로 나아가지” 그렇지 않은 자는 지금은 예수님께로 오는 것 같을지라도 결국엔 빛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은 이미 착하게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빛은 이렇게 어떤 사람의 행실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좋은 행실을 하는 사람은 그 행실이 더 드러나게 만들기 위해 빛으로 나아오고 어둠의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더 멀리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인지 어둠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단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그대로 나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내 이름은 칸’(My Name Is Khan, 2010)은 인도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앓는 인도 무슬림 남성이 미국에서 테러와 편견에 맞서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칸은 남자아이가 있는 이혼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내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심화되고 이슬람 혐오가 높아집니다. 이에 따라 칸과 그의 가족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아들이 새 아빠 때문에 이슬람 성을 쓰게 되어 학교에서 인종 차별적인 놀림을 겪고 결국 참혹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내는 아들이 죽은 것이 무슬림인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아이들을 찾아내려 하지만 목격 증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한 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아이도 아이들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내는 칸을 떠나버리라고 내칩니다. 칸은 어떻게 하면 돌아올 수 있느냐고 하고 어이가 없는 아내는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 아들이 테러리스트의 아들로 죽은 게 아니게 되니까. 

칸은 이내 짐을 싸서 대통령을 만나러 갑니다. 당연히 가는 길도 험난했고 가서도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해받아 심한 고문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무슬림이기는 했지만, 무슬림 테러단체를 신고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언론이 그를 주목합니다. 

그는 유명 인사가 되고 드디어 아내가 보는 앞에서 대통령을 만나 아내가 원했던 말을 합니다. 이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친구들이 칸의 아들을 폭행해 죽였다고 경찰에 실토하게 됩니다. 

빛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빛 안엔 거짓이 없습니다. 그 거짓 없음은 주저하는 이를 거짓이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거짓이 있는 이들을 더 숨게 만듭니다. 착한 사람은 더 착하게 만들고 악한 사람은 더 악하게 합니다. 이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왜 빛이 심판관이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가 빛이 되려면 예수님 이전에 예수님처럼 착하기를 원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의 선함에 내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 나아가야만 더 착해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분께 나아갑니다. 그러면 나도 빛이 됩니다. 

착해진다는 말은 거짓말과 자아, 그로부터 발생하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를 살리고 이웃을 죽이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육.마.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고 친해진다면 나는 빛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멀리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다가온다면 나는 빛입니다. 

이것이 내가 빛인지 어둠인지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나에게 모이는 사람이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 욕망을 따르고 이웃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어둠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들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빛입니다. 이렇게 빛을 통한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의 구원을 통해 이웃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빛으로 나아가는? 빛으로부터 숨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가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자기의 죄악이 다 드러나기에 나아가지 않고 숨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주님이고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빛이지만 죄를 지으면 영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제로도 빛이 두려워 숨습니다. 

어려서 제가 돈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남의 집에 갔을 때 방바닥에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그것을 가졌습니다. 돈을 훔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저는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어렸는데 집에 와서 그 돈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자니 차츰 제가 나쁜 짓을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집을 나가서 밤늦도록 밖에서 떨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죄의식이었고, 어린 제게는 밤이 무척 무서운데도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의 두려움보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죄짓고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숨었는데 죄 드러나는 것의 두려움이 하느님의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죄를 숨기려던 것이 하느님과 단절케 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시편 139편에서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라고 다윗이 노래하듯 하느님은 다 아시는데 숨느라 하느님과 단절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지만, 다윗도 처음에는 바세바와 간음한 사실을 숨기려고 그 남편을 죽인 사람이고,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 사실을 드러나게 하시자 시편 51편에서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노래하고, 139편에서도 앞에서 본 것처럼 노래한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인간은 죄를 숨기려다가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하느님과 단절되고 마는데, 오늘 저는 결이 좀 다른 차원에서 우리 삶을 성찰코자 합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 차원 말입니다. 

저의 경우 프란치스코를 알면 알수록 제가 프란치스코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프란치스코를 닮으려 애를 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프란치스코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발견하고, 그리고 더 있어봤자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수도회를 떠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저와 같이 수도회를 떠나지 않더라도 프란치스코를 알수록 자기의 한계를 보는 것이 괴로워 프란치스코에게 나아가기를 중단하고 차라리 다른 성인들 얘기를 강론이나 강의 때 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꼭 따라야 하지만 다른 성인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의 공동생활에서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잘살고 있는 형제들 곧 빛이 되는 형제들도 있는데 그런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부담스러워 편한 형제들과만 어울리거나 더 안 좋은 경우는 유유상종하며 공동체의 어두운 면만 뒷담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자신을 성찰합니다. 나는 빛으로 나아가는 존재인가? 나는 빛으로부터 숨는 존재인가? 

오늘부터 한 주간 모 수녀회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 강론은 수녀님들을 위한 강론입니다. 감안해서 들어주시고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목적과 파견은 예수님을 통한 사랑의 구원에 있습니다. 하느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구원과 해방 치유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수난은 피조물과 하나 되고자 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구원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사랑이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모아집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순간이 바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로 결합하는 놀라우신 사랑입니다. 사랑은 심판이 아닌 구원과 회복을 되찾아 줍니다. 참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참된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참된 사랑은 삶다운 삶인 사랑이며 구원입니다. 구원은 심판이 아닌 사랑의 실천임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뜨겁게 배웁니다. 오늘의 구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오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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