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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1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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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니, 이제는 죽음이 그분을 누르지 못하리라.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이 땅의 부모에게 받은 모습을 벗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2023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4,23-31)
    기도를 마치자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3,1-8)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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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복음
요한 3장 1-8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7일 (월)
박민재 미카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4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7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51

📌 강론시작 18:53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7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35

📌 미사시작 1:03:26

📌 강론시작 1:11:3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고 있나요?

 

오늘부터 삼 일 동안 미사 전례에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가 선포됩니다(3,1-21 참조).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이르렀지만, 아직 그의 믿음은 불완전하게 보입니다(2,23-24 참조).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 너머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천상 세계를 바라보도록 니코데모를 안내하십니다.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는 요한 복음 3장 3절에 담겨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는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위로부터 태어남’을 내세우십니다. 이 표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위로부터’라고 옮긴 그리스 말 ‘아노텐’은 ‘다시’라는 시간의 의미와 ‘위에서’라는 장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니코데모는 이 낱말을 ‘다시’라는 시간의 의미로만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의 오해를 풀어 주시려고 고쳐 설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날 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에만 머무를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영역 너머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근육의 양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신의 힘

 

2014년 아놀드 스트롱맨 클래식에서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린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드루나스 사비카스로 약 524kg의 바벨을 들어 올린 것입니다. 50kg이 넘는 여성 10명을 들어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믿지 못할 일이 생겼습니다. 교통사고로 자동차 아래 깔린 아이를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던 경찰이 자동차를 들어 올려 아이를 구한 것입니다. 이 차의 무게는 어떻게 될까요? 자그마치 1,300kg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힘이 나온 것입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근육의 양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신의 힘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증명하기 힘든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실제로 정신의 힘이 대단한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일도 보이는 것,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일까요? 계속해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 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서 거부하곤 합니다. 어마어마한 힘이 주님에게서 나오는데, 그 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해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보다 믿어야 할 분이십니다. 그 믿음 안에서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이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찾아갔던 것이지요. 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지만, 아직 그의 믿음은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니코데모를 이끄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세상에 태어나지만 하느님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신앙인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아무도 체험하지 못한 길입니다. 그래서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어야 할 분으로 모시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긍정적인 힘보다 강한 것은 세상에 드물다. 미소, 낙관주의와 희망의 세상. 상황이 어려울 때도 '당신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 리치 디보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새로 태어났는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님임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고백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로 새로 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지만 니코데모는 어떻게 새로 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을 우리는 ‘세례’라 부릅니다. 그리고 세례로 새로 난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특성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바리사이는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지만 그는 육으로 구별되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으로 난 사람이 진짜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삽니다. 

우리는 과연 새로 난 사람들일까요?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만약 북한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면 어떨까요? 당장 끌려가서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자신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새로 남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 태어나는 세례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12)

우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새로 부활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라면 이 세상 것을 추구할까요, 아니면 천상의 것을 추구할까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따라서 세례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믿음과 내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동시에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지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부활 대축일 어린이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하는데 한 여자아이가 달려 나와 계속 “나 신부님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봤는데?”라고 물으니 “아이 때 봤는데…”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너 지금 아이야!”라고 했더니, 정색하며 “아니에요, 저 지금 일곱 살이란 말이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아기 때의 행동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이미 아이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을 찾지도 않을 것이고 공갈 젖꼭지도 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라고 믿는 삶을 청산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주기 위해 부모는 자신들의 피를 음식이나 보살핌으로 아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삽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직도 돈 때문에 감정이 흔들리고 남들의 나에 대한 평가 때문에 감정이 상하며 육체적 배고픔 때문에 걱정한다면 어떻게 새로 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 목사님 중에도 세례를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임을 줄기차게 주장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선한 목자 교회 유기성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한 세례 신자의 간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자분인데 이분이 가정생활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아내와 지내는 것보다 친구와 어울려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어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처음에 너무 황당했고 농담인 줄 알았지만, 남편은 진심이었습니다. 자신도 자기 인생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선한 목자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만약 당신에 세례를 위한 1대1 교리 열 번만 받으면 내가 이혼해 줄게”라고 말했습니다. 열 번으로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 교리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3번쯤 받으니 ‘이러다가 내가 하느님을 믿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불안감이 밀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이제 이혼해야 할까요? 세례를 받으면 이제 아내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영원한 반려자가 됩니다. 그래서 절대 이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와 즐기는 것을 줄여야 할 것입니다. 친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으로 난 사람은 세상에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으로 태어나 이전의 내가 죽었음을 믿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여 분명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새로 태어난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인 겸손.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오늘 복음을 지금까지 수없이 읽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밤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니코데모가 밤에 찾아왔다는 것을 지금까지 지나쳐 본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아주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남몰래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기를 바란 거지요. 

왜 그랬을까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이 체면이 서지 않아서? 유대교 지도자가 풋내기를 찾아가는 것이 역시 체면이 서지 않아서? 아니면 다른 바리사이들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시선이나 비판이 두려워서? 

제 생각에 이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서 밤에 찾아온 것이고, 그러기에 니코데모는 아직 인간적이고 세속/육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니코데모는 우리가 복음에서 많이 봐온 다른 바리사이나 최고의회 의원과는 다른 그러니까 훌륭한 면모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겸손합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한참 풋내기인데 최고의회 의원이 예수님을 찾아온다는 것은 인간적인 지위를 따지지 않고 예수님을 스승삼아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겸손은 인간적인 덕에서 비롯된 겸손이 아닙니다. 신앙적이고 영적인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라고 프란치스코가 권고에서 얘기하듯 하느님 앞에 있는 자의 겸손이지요. 

그래서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제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한 것이 하늘의 표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이 세상에서 지닌 위치 때문에.인정하려고 들지 않고 사도들의 활동을 막으려 하고 박해를 하는데 니코데모는 주님이 하느님에게서 온 분이라는 것을 표징을 통해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땅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늙어서도 위로부터의 지혜를 찾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덕으로 그리니까 겸손과 열망으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긴 하였지만 아직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아니고, 그래서 아직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지만 아직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했기에,그래서 그는 더욱 안타까워하고 늙어서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고파 애타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이는 우리의 교리가 습득덕(習得德)과 주부덕(注賦德)을 얘기하듯 우리의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겸손과 열망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이 역사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니코데모가 참 부럽습니다. 세상의 허위와 허영이 없이 겸손하고, 늙어서도 하늘 열망, 구도 열망이 여전히 있으며, 그래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 결국 영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이니. 

니코데모를 영적으로 잘 늙고 실패하지 않는 우리 인생의 모범으로 삼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새롭게 변화된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변화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변화된 삶은 회개의 여정 십자가의 여정 자기 부정이라는 죽음을 언제나 동반합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고 비우는 길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워진 삶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삶을 충만히 사는 기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회개와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우리의 힘이 아닌 하느님 은총의 참된 힘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참된 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듯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합니다. 물과 성령은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를 위로부터 태어나는 성령의 삶을 가리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오늘이 바로 참된 자아의 생일입니다. 자아의 죽음도 자아의 변화도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복음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모든 것을 부활하신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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