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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1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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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알렐루야.

하느님,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믿는 이들이 불어나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 백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세례성사로 새로 난 저희가 불사불멸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4월 15일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4,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4,20)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5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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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복음
마르코 16장 9-15절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5일 (토)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0:2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5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35

📌 강론시작 20:1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5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1

📌 강론시작 08:4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5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2:33

📌 미사시작 43:45

📌 강론시작 54: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고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에 우리는 마르코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듣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시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16,9-11 참조).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시골로 걸어가는 두 제자와(16,12-13 참조), 식탁에 앉아 있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16,14-18 참조). 

빈 무덤 이야기(16,1-8 참조)에 이어 등장하는 이 세 개의 발현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의 ‘긴 결말’(16,9-20 참조)에 속하는 부분으로, 다른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부활 발현 이야기들(요한 20,11-18; 루카 24,13-35.36-49 참조)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한 제자들의 ‘불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사건을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에게 전하였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시골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에 관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그들도 이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지만,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목격한 이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결단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70년 휴스턴 대학은 의과대학에 지원한 학생 중에서 먼저 필기시험을 쳐서 우수한 학생을 가려냈습니다. 그리고 필기시험 합격자 중에서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선정했지요. 면접관들은 학업을 잘 감당하고 나중에 더 좋은 의사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들을 뽑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행정착오가 있었습니다. 더 많은 인원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적은 인원을 뽑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면접에서 떨어뜨린 지원자 중 많은 학생을 합격시켜야 했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졌던 학생들은 나중에 실력이 부족한 의사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학 생활에서도 성적의 차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떨어졌던 학생 중에서 능력이 특출한 의사가 많이 배출된 것입니다. 면접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보다는 면접에 합격한 학생들은 면접에만 더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무조건 정답은 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얼마나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쏟아졌습니까? 100% 맞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이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하긴 전문가들의 판단에 대한 진실 여부를 계산한 통계가 생각납니다. 겨우 54% 맞았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의 판단은 하느님이 아닌 이상 100% 맞을 수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판단에 무조건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판단에 의지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는 굳은 믿음을 보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해서는 불신의 마음을 보입니다. 제대로 살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사람의 판단만을 믿습니다. 즉, 세상의 관점을 통해서만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전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또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가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렸어도 여전히 믿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세상의 판단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판단을 뛰어넘는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세상의 관점만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고 철저하게 의지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 사람은 주님의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가 모두 편견을 비난하지만 아직은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

- H. 스펜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현재 모습은 내가 속했던 공동체의 믿음이었다.

 

어느 공동체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결속력은 결국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금방 해체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처럼 믿지 못하는 사도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들이 부활을 믿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고 싶으면 그 공동체에 속하고 더 믿고 싶다면 그 공동체의 핵심 요원이 되면 됩니다. 만약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지금보다야 예수님 부활 체험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가 당신 부활을 전하도록 더 큰 확신을 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려면 마패를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세계적 싱어송라이터가 된 에드 시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눈 주위의 커다란 점을 수술하였는데 마취하는 것을 잊어버려 청각 장애, 사시 현상, 심지어 말더듬증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빨간 머리와 커다란 안경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감이었는데, 이젠 누구 앞에서도 감히 나설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시켜주었던 음악이었습니다. 

에드 시런이 평생 말더듬이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래퍼 에미넴의 음반을 선물해 주었고 에드 시런은 1년 동안 그의 음악을 달달 외우고 따라 하며 말더듬증을 고쳤습니다. 아버지는 또 그가 아이들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고 아일랜드 출신 싱어송라이터, 데미안 라이스 공연을 보여주고는 술집에서 에드 시런에게 그를 만나게 주선해주었습니다. 이때 자신도 그러한 싱어송라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좁은 물에서 놀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에드 시런은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으로 올라와 길거리에서 생활하며 공연했습니다. 4년 동안 굶고 길거리에서 자며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자신과 작업을 하자는 무명 가수들을 만납니다.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하며 영국에서 점점 인지도를 쌓아갔습니다. 

그러다 영국도 좁다고 생각하고는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라디오 디제이 하던 제이미 폭스를 찾아갔는데 그만이 그의 음반을 들어주었고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아봅니다. 제이미 폭스는 에드 시런을 자기 집 소파에 재우면서 자기 공연의 객원연주자로 출연시킵니다. 그렇게 에드 시런은 미국에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제이미 폭스는 에드 시런이 정규 앨범을 내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는 미국과 영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정규 앨범을 들은 미국 대스타가 있었습니다. 당시 호주에서 공연하고 있던 테일러 스위프트였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에드 시런을 불러 함께 곡을 만들고 그가 2집을 내는 것을 도와줍니다. 테일러 스위프트도 어렸을 때 따돌림당했던 같은 기억이 있기에 둘은 서로 잘 통했습니다. 어쩌면 깜짝 스타로 머물 뻔하였던 에드 시런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통해 대스타로 성장합니다. 

그에게 마지막 방점을 찍어준 사람은 지금의 그의 아내 체리 시븐입니다. 체리 시븐은 학교 동창으로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였습니다. 에드 시런은 그녀에게 집중하기 위해 모든 SNS를 끊고 그녀와 여행을 떠납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갑자기 낸 정규 3집은 드디어 빌보드 1위를 하며 모든 곡을 20위 권 안에 들게 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에드 시런은 분명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는 대상은 공동체입니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가 주는 믿음만큼 우리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유학을 9년 했는데 저 자신도 모르게 그쪽 문화에 적응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직설법만을 고집하던 유럽 문화의 사고방식에 젖어 돌려 말하는 우리나라 말에 적응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머물면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그 공동체의 정신에 스며들고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에 머물면 그리고 내가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기만 한다면 그 믿음이 스며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공동체가 믿음을 가지기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현세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고 싶으면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안 믿어진다면 착하게 되게 위해서라도 믿는 공동체에 들어가 머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머물고 싶습니까? 당신은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공동체, 혹은 인간이지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공동체, 아니면 당신도 하느님 자녀이니 당신도 부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는 공동체 중 어느 공동체에 머물고 싶습니까? 그 공동체의 믿음대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지 못하는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복음은 복음 전체가 그렇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주님 부활의 기사도 아주 짧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얘기.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애기. 

그리고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얘기. 

이렇게 세 가지 부활 발현 사화가 마르코복음에서는 짧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열 한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주님 부활 얘기를 믿지 않고, 두 제자가 전한 부활 얘기도 믿지 않다가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습니다. 

이렇게 짧은 주님 부활 발현 얘기를 제자들이 믿지 않은 얘기로 채운 다음 마르코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 사명을 주신 얘기로 끝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참으로 이상스럽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철석같이 믿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맡겨도 그 사명을 잘 수행할까 말까일 텐데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그 중요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당신도 믿지 못하면서도 맡기신 것인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당신은 그래도 믿으시기에 맡기신 것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와 하느님의 믿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차이이지요. 

작은 믿음은 큰 믿음도 불신하거나 배신하는 데 비해 큰 믿음은 작은 믿음도 믿습니다. 

작은 믿음은 주님께서 더 큰 사랑 때문에 주시는 고통에도 사랑을 의심하고, 조그만 안 좋은 일이 닥쳐도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큰 믿음은 애초부터 제자들이 당신의 크신 사랑을 작은 고통 때문에 배반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믿으시고, 유다와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당신 제자 삼으시고 교회의 반석 삼으셨습니다. 

작은 믿음은 믿음대로 금방 되지 않으면 불신과 배신으로 이어지지만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줍니다. 아니, 기다릴 뿐 아니라 성장하도록 격려해줍니다. 

작은 믿음은 내가 바라는 대로 돼야지만 믿음을 지속하지만 큰 믿음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도 믿음을 지속합니다. 

큰 믿음은 큰 허물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며 상대를 믿어주지만 작은 믿음은 작은 허물도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단죄합니다. 

작은 믿음은 그 보잘것없는 믿음을 가지고 생색내거나 자기 믿음이 배신당한 것에 대해 크게 상심하고 포기하지만 큰 믿음은 믿음의 배신자를 용서하고 품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큰 믿음은 당신의 큰 믿음이 제자들의 작은 믿음 때문에 배신당해도 믿은 대로 될 때까지 믿어주고, 믿은 바대로 되도록 온갖 은총, 무엇보다도 성령을 주십니다.
.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어둠이 빛을 만나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따뜻한 소식을 여러 차례 더 우리에게 전하시는 주님의 애틋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모르기에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들리는 소식마다 힘들고 아픈 소식이었는데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기쁜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법을 바꾸는 믿음이며 희망이며 사랑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삶은 사랑의 상처에도 감사하는 삶입니다. 삶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하는 기쁜 소식을 오늘도 전하는 우리는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와 사랑 부활과 상처가 하나라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복음으로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간 첫날 새벽에 무덤에서 엠마오 길에서 식탁에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복음이 선포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복음의 선포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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