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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1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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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여라. 너희는 그 젖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영원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로 저희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니 더욱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물로 깨끗해지고 성령으로 새로 난 이들이 성자의 피로 얻은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2023년 4월 16일 (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2,42-47)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제2독서
    (베드로1서 1,3-9)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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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복음
요한 2019-31절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6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6:0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6일 (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48

📌 강론시작 21:23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6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부활 발현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20,11-18 참조) 이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소개합니다.

두려움에 싸여 문을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인사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 인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세 번에 걸쳐 되풀이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이 파견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그리고 부활 사건을 의심하는 토마스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고자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 인사는 당신의 죽음에 앞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의(14,27-28 참조) 실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주시기로 약속된 평화의 선물이 주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시어 지금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죽음을 이겨 낸 승리의 평화로서 세상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 의심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16,33 참조). 여기에서 평화 인사는 가정 이나 기원의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 선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평화 인사를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던 두려움과 의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글을 읽다가 감명받은 구절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우아한 장밋빛을 띠고 향이 달콤해 인간의 기술로는 그런 과즙을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운 복숭아를 생각해 봐. 하느님께서 그렇게 아름다운 빛깔을 만드시고, 그렇게 부드러운 벨벳 같은 껍질을 만드신 것이 복숭아 자체를 위한 것일까? 그것을 그렇게 달콤하게 만든 것은 복숭아를 위한 것일까? 아니야. 그건 우리를 위해서야. 복숭아 자체이고, 그 존재에 본질적인 것은 씨앗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 글을 읽고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복숭아를 사람으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자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함께 사는 우리를 위해서이고, 결국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에만 그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자기만족은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소유/욕망’이라는 도식을 보십시오. 자기만족은 소유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가 크면 클수록 동시에 늘어나는 것이 욕망입니다. 결국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노력한들 행복은 커지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욕망은 줄어듭니다. 소유가 적어도 행복해질 수 있게 됩니다. 자기만족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토록 갖고 싶던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는 제자들의 주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가 직접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그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자기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기만족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함께 있던 자리에 다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를 향해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함을 통해 자기의 부족한 믿음을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면서 자기만족만을 추구합니다. 이로 인해서 더욱더 불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그 세계에서 나와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의 삶이 함께 어우러지는 ‘함께’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셨지, “평화가 너와 함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친절한 말은 마치 봄볕처럼 따사롭다.

- 러시아 속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소 우리 감정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명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사도들에게 첫 번째, 두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토마스 사도는 첫 번째 발현 때는 함께 있지 못했고 두 번째는 함께 있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감정’의 변화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었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행복하지 않으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부활하여 하느님 나라에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나 그 공동체를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결속력은 결국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금방 해체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싶으면 토마스처럼 그 공동체에 속하여 일정 기간을 버티어내면 됩니다. 


헝가리인인 ‘라즐로 폴가’는 천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나 누군가가 믿어주면 자녀가 그 믿음대로 천재가 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싶어서 자신의 딸 셋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정말 딸 셋은 다 세계적인 체스 기사들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이 거의 나오지 않고 유태인들은 많은 노벨상을 탈까요? 그것은 믿음에 기인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주는 믿음이 다르고 유태인들 교육이 주는 믿음이 다른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백성으로 바다도 가를 수 있고 광야에서 40년을 아무것도 없이 버틸 수 있는 존재들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안 하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무신론적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세계적 싱어송라이터가 된 에드 시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눈 주위의 커다란 점을 수술하였는데 마취하는 것을 잊어버려 청각 장애, 사시 현상, 심지어 말더듬증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생 말더듬증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바꿔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래퍼 에미넴의 음반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에드 시런은 아버지의 뜻대로 1년 동안 그의 음악을 달달 외우고 따라 하며 말더듬증을 고쳤습니다. 아버지는 유명 가수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가 가수가 될 꿈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에드 시런은 길거리 가수부터 시작하여 미국으로 무작정 건너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이 제이미 폭스였습니다. 제이미 폭스는 자신의 공연에 무명인 에드 시런을 참여시켜 주었고 첫 앨범을 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유명해진 에드 시런은 이제 더 클 수 있음을 믿어주는 톱스타 테일러 스위프트를 만납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처지를 살아온 에드 시런을 자신처럼 세계적 스타가 되게 해줍니다. 

에드 시런은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여행을 다닙니다. 이때 애인 체리 시븐으로부터 무엇을 얻었겠습니까? 더 큰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낸 앨범은 경이로울 정도의 인기와 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나가며 살아갑니다. 그 어려움을 겪을 힘은 바로 언젠가 부활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을 맛보고 힘든 중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두 팔이 없고 한 다리는 30cm밖에 안 되는 중증 장애인인 레나 마리아는 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노래와 그림 실력은 프로급이며 인기도서 작가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오로지 발 하나로 합니다. 하지만 그녀도 “엄마, 난 친구가 없어요!”라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왜 친구가 없어. 예수님이 네 안에 계시잖아!”라고 말해주었지만, 그녀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니까 그렇게 말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즈음 전화 한 통이 그녀를 바꾸어놓습니다. 

“레나 마리아 씨죠?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많은 사람이 응원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믿음 공동체의 힘입니다. 부활을 믿느냐는 질문에 레나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나약한 저의 육신과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는 제 입술을 당당히 보여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활의 공동체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제 생각에 오늘 사도행전에서 소개되는 이상적인 초대교회는 <함께> <같이>와 <하나>라는 말이 열쇠말인 것 같습니다. 

함께 지내며 함께 먹었다고 얘기하고 있고 모든 것을 같이/공동으로 소유했다고 하고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고 빵을 나눴다고도 합니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共)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고 동(同)이라는 말은 <같은>이나 <다같이>의 뜻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공동체란 함께 다 같이 이룬 같은 몸이 아닐까 또한 생각합니다. 여기에 한마음으로 모였으니 초대 공동체는 그야말로 일심동체(一心同體)가 아니겠습니까? 

먼저 함께 이루는 공동체성을 보겠습니다. 너무도 지당한 것이 공동체는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점점 늘고 있고 그래서 ‘혼밥족’이니 ‘혼술족’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저는 처음 혼밥족, 혼술족이라는 말이 신문에 등장했을 때 한동안 이게 무슨 신조어인지 몰라 이해를 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늙은이들은 가족들과 같이 살고 싶지만 사별하였거나 자녀들이 원치 않아서거나 독거노인으로 혼자 살고 젊은이들은 공부나 직장 때문에 가족과 떨어지거나 혼자 사는 것이 좋아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삽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것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지만 요즘 문제는 같이 사는 것을 싫어하거나 같이 살 수 없어서 혼자 밥을 먹고 술까지 혼자 먹는 ‘혼밥족’과 ‘혼술족’입니다. 

어떤 때 보면 같이 살겠다고 모인 수도 공동체 안에서도 무엇을 해도 같이 하려 하기보다 혼자 하려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잘못 기능을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안타까운 현상이지요. 

다음으로 같은 몸을 이루는, 같이 하나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같은’은 ‘다른’의 반대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다른데도 같이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이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름’이나 ‘차이’를 인정치 않는 획일적인 공동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인정치 않고 같아야만 한다면 성격이 달라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할 것이고 취미나 신분이 다르면 같이 어울릴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다름에도 하나를 이루지만 그 이유가 저속한 경우입니다. 권력이나 이익 등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라도 그래서 싫어도 한 배를 타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경우지요. 

요즘 정치에서 이런 형태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이나 이익과 같이 이기주의적인 차원의 목표를 넘어서는, 말하자면 좀 더 숭고한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처럼 같은 이념(理念)과 주의(主義) 때문에 같이 모이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공동체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꼽는 최고의 공동체는 역시 사랑의 공동체일 겁니다. 성격, 취미, 능력, 출신, 생각, 민족, 종교 등 모든 것이 달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사랑이 제일 숭고하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를 이룰 수 있고,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가 최고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는 초대공동체는 이것도 넘어섭니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와 자기 것이 없기에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초대공동체는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의 수난과 부활로 부활의 기쁨, 거듭남의 기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소유했기에 이 세상 것을 다 내놓아도 기쁘기 마련이지요. 

하느님 나라가 내 것이기에 이 세상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그런 부활의 기쁨과 그런 부활의 공동체를 꿈꾸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가장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예수님의 상처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상처는 하느님의 자비이고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지나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참된 부활입니다. 상처도 축복일 수 있음을 부활의 신앙 안에서 뜨겁게 다시 깨닫게 됩니다. 아픔이 아픔을 알아 보고 슬픔이 슬픔을 알아봅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우리 본모습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상처는 자비의 길이며 자비는 부활의 길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지울 수 없는 자비의 역사입니다. 자비(慈悲)는 우리의 상처를 뜨거운 신앙고백으로 만듭니다. 상처(傷處)가 있는 한 자비도 함께 합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우리의 상처에서 만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상처는 실패와 좌절이 아닌 변화의 방향입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상처에 다가갈수록 빛나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상처로 우리가 용서를 받고 다시 아름다울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고 우리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십자가의 상처와 자비 사이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오직 자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큰 자비를 체험하는 부활의 자비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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