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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1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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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 구원을 보증해 주셨으니 저희가 충만한 새 생명을 누리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선포하게 하소서.

 

2023년 4월 18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한마음 한뜻 (사도행전 4,32)

 

한마음 한뜻 (사도행전 4,32) 사도행전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4,32-37)
    한마음 한뜻.

  • 오늘 복음
    (요한 3,7ㄱ.8-15)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8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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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복음
요한 3장 7ㄱ.8-15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8일 (화)
김규동 요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5:4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8일 (화)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51

📌 강론시작 13:0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8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41

📌 강론시작 05:3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8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53

📌 미사시작 1:03:59

📌 강론시작 1:09: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코데모를 위하여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 3장 1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일’을 권위 있게 증언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사람의 아들로서 유일하게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의 서문이 앞서 증언하였듯이, 외아들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1,18 참조). 여기에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증언을 듣고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3절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자로 확증하였다면, 3장 14절에서는 어떻게 그 계시가 일어날 것인지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려 주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을 뱀이 들어 올려짐과 비교하십니다. 

여기서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표현은 물리적 의미와 함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암시하는 신학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는 높이 들린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니코데모처럼 예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알려 주시면서 당신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잠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한마음 한뜻

 

중학생 때, 저는 아주 이기적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중요했고, 다른 사람은 저의 이익을 위해 또 필요로 인해 함께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공부에 있어서는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을 보면 늘 등수가 매겨지니, 제가 최고 윗자리에 다른 친구는 모두 제 아랫자리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옆 반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수험 시간에 사용해야 할 참고서를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았다면서 1시간만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빌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다음 시간에는 필요한 참고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도 경쟁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 나도 안 가져왔는데?”라고 말하면서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시간, 문제가 생겼습니다. 참고서를 가지고 왔지만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참고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제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저의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없는 척했습니다. 
 
결국 참고서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선생님께 혼났습니다. 수업에 꼭 필요한 준비물도 챙겨오지 못한 사람은 공부할 자격도 없다면서, 교실 뒤에서 한 시간 동안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방에 참고서가 있음에도 저는 한 시간 동안 교실 뒤에서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은 결코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에게도 큰 상처를 줍니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이 안 되길 바라는 마음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가장 커다란 겸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일을 말하는 당신의 말을 듣고 믿으라고 하시지요. 이것이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육에서 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육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키우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태어나는 삶, 영적인 것에 중심을 두는 삶은 그런 세상의 것에서 벗어나 주님을 체험하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부활의 체험 후에 신자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도 이 모습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있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비유를 이해함이 왜 심판의 기준이 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새로 남’에 대해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뱀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그 뱀을 예수님 자신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구리뱀을 보면 치유되었습니다. 이는 누구나 다 자기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뱀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다면 구원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혀서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 같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한탄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세상일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곧 하늘 일의 비유를 말합니다. 비유는 쉽게 이해하라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서 자신들, 곧 선택된 이들만을 구원하시려고 한다는 사이비들의 말은 하느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영혼도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니 쉬워지라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쉬운 비유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천상 구원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 한 연세 지긋하신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학벌도 좋으시고 세상에서도 승승장구하시던 분이십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너무나 집에 악재가 겹쳐서 커다란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한 친구가 종교를 가져보라고 권유하였고 이분은 목사님 친구분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올 1월부터 통신교리로 세례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분의 친구분 중의 한 분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저에게 상담해보라고 추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우 영광스러웠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친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찾아오신 분의 질문은 왜, 혹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는 이미 친구분을 통해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 어머니가 너의 친어머니인 것이 확실하냐? DNA 검사를 해서 믿느냐? 안 믿으면 안 되니까,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보고 믿지 않느냐? 하느님도 어머니처럼 가진 것을 다 내어주시며 당신이 부모라고 하신다. 어머니를 믿지 않는 것이 지옥이듯, 하느님을 믿는 것도 선택이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는 게 당연하듯, 우리가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사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뭐 누가 봐도 그 친구분은 저의 글이나 동영상을 보신 분이십니다. 제가 어머니를 믿어가던 과정을 분명 들으신 것입니다. 친구분의 이 말씀으로 저를 찾아오신 분도 하느님을 창조주로 이미 믿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실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엔 왜 믿지 못하셨을까요? 아직 자기 생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 지상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해하기 쉽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비유를 이해하지 못함이 곧 심판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이 지상의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겸손해져야 합니다. 아무리 쉬운 비유를 말하더라도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 생각에 쌓여있으면 그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므로 쉬운 비유조차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구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역사로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로마 비블리꿈 조교수가 성경은 있는 그대로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게 상징적인 눈으로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집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구 죽이셨는데 그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시고 이집트 백성은 미워하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도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 자기주장이 꺾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를 인정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의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고 하시며 어떻게 우리가 하늘에 오를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어떤 누구도 하늘에서 새로 나지 않으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의 시를 쓰신 심순덕 시인처럼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신도 결혼해서 어머니가 되어보니 그런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머니의 피 흘림을 통해 또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피를 흘립니다. 장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여 묻힘은 곧 부활로, 자녀들의 공경으로 들어 높여집니다. 

하늘에서 와서 자신을 새 생명을 주기 위해 못 박아 죽이지 않으면 다시 들어 높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신비는 우리 일상에 숨어있습니다. 하지만 땅의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니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받아들이려고 하는 ‘겸손함’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결국 그분은 나의 교만,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우리 공동체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주님께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해서 바람이 불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알아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만일 저더러 자기 집에 안 오면 삐질 거라고 하거나 누구네 집이 부잣집이니 그 집은 꼭 들려야 한다고 하면 저는 그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갈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비슷한 뜻으로 말씀하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분이시잖아요? 또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에게 가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초월과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월하지 않으면 자유롭지 않다.” 

이런 뜻에서 저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초월해야지만 위로 올라가고, 위로 올라가야지만 이 세상 것에서 자유로워지며,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자유로우신 성령을 만난다는 얘깁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하나만 초월하지 못해도,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하나에라도 매여 있으면 그 하나가 나를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하고 성령을 못 만나게 합니다. 풍선이 하늘로 오르고자 하나 가는 실 하나에 매여 못 오르듯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풍선은 실 하나로도 위로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실에 매여 있는 풍선은 어떻게 그것을 끊고 오를 수 있으며 수없이 많이 소유한 것들과 그것을 소유케 한 그 많은 소유욕에 칭칭 감기고 매여 있는 우리는 어떻게 위로 오를 수 있겠습니까? 

맨 것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합니다.,이것을 풀면 다른 욕심이 생기고 그래서 그것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않기로 하지 않는 한 하나를 버리면 그 없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갖고자 할 것입니다. 앓던 이가 빠져도 허전한데 애지중지하던 것을 버리고 나면 빈자리가 허전하여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칼에 모든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쫓아온 부자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라고 하신 것처럼 다 팔고,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다 팔아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소유와 탐욕과 욕망을 정당화하고,,심지어 소유와 탐욕을 세뇌하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못 가져서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듦으로써.소유와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불행케 만듭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되고,,더 좋은 것을 가지려다가 불행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인데,,이 세상은 도리어 주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거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따르고 누구를 따를 것인가 심각하게 도전받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삶이 치열할수록 성령의 바람도 거셉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아둘 수 없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서로를 주저앉히지만 하느님의 영은 사랑으로 날아가도록 풀어주고 놓아줍니다. 

깨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회개와 복음이 시작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다양한 체험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베들레헴 갈릴래아 카나 예리코 십자가와 무덤 부활로 복음을 만드십니다. 열리고 흐르고 번지고 닿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바람처럼 우리의 삶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임을 뜨겁게 배우는 거듭남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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