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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1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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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물을 마시면, 굳세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지혜가 너희를 영원히 들어 높이리라. 알렐루야.

하느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 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2023년 4월 11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2,36-41)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20,11-18)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1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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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복음
요한 20장 1-18절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1일 (화)
박희전 루케치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1일 (화)

 

📌 미사시작 08:29

📌 강론시작 18:5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1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2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1일 (화)
팔로티회 분당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36

📌 강론시작 13:4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복음(20,1-9 참조) 다음 대목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계속 등장하고 장소의 변화도 없다는 점에서 두 복음의 연속성이 확증됩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고, 마리아는 무덤에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떠나 보낸 상실감에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20,8 참조), 마리아는 아직 빈 무덤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데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불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극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응답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마리아의 ‘뒤늦은 인식’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어둠 가운데 머물러 있던 마리아에게 믿음의 빛을 선물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 신앙을 증언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믿음의 여정을 보여 줍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천사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였지만, 이야기의 끝에서 마리아는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여 제자들에게 달려간 마리아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부활 신앙의 실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왕따 당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왕따 시키는 것이 잘못일까요?

 

한 학부모가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철수가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지 않고 책만 봐요. 계속 저러면 나중에 왕따 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아이에게 잘 말해서 친구들과 놀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2) 왜 혼자 책을 읽냐면서 아이를 나무랍니다. 
 
3) 이런 전화를 왜 하냐면서 선생님께 화를 냅니다. 
 

아마 1번을 선택하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1번은 분명히 정답이 아닙니다. 왕따 당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왕따 시키는 것이 잘못일까요? 친구와 놀지 않고 책만 보면 왕따 당할 수 있다면서 마치 아이의 책 읽음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왕따 시키는 아이의 잘못이 아닌, 왕따 당하는 아이의 평소 행동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1번으로 늘 유도합니다. 
 
사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면서 그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약자인 피해자 중심에 서야 분명히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피해자 중심이 아닌 가해자 중심의 세계였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인 병자와 창녀 그리고 과부 등의 사람은 죄가 많아서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당시에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 편에 서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커다란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주님 말씀을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까지 받습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편에 서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칠 때,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꽃에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품격이 있다. 그러나, 신선하지 못한 향기가 있듯 사람도 마음이 밝지 못하면 자신의 품격을 지키기 어렵다. 썩은 백합꽃은 잡초보다 그 냄새가 고약한 법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사랑하려는 이에게만 나타나시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도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타락의 소굴에서 건져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다 보면 믿어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믿으면 사랑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사랑을 떠받치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원하고 믿는 일은 사랑을 높이기 위한 목적입니다. 물론 믿어지면 더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하려는 자에게 믿음을 가장 먼저 주십니다. 

영화 ‘라이언’은 어린 시절, 기차에서 잠들어버린 다섯 살 인도 소년 꼬마 라이언이 호주에 입양되었다가 다시 어머니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다섯 살 꼬마 라이언은 형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석탄을 훔쳐 엄마에게 우유를 사다 드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이자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형이 나갈 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졸랐지만, 잠이 너무 쏟아져 형은 동생을 업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잠깐 자라고 하고 절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라이언은 잠을 자다 일어났고 형을 찾아 어떤 기차에 올랐는데 거기서 또 잠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며칠을 그렇게 간 끝에 더는 집을 찾을 수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아원에 있다가 그는 사랑이 많은 한 호주 가정에 입양됩니다. 

그의 양부모는 다른 형도 한 명 입양하였는데 그 형은 좀 망나니였습니다. 엄마도 사랑스러웠지만, 엄마를 사랑할수록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친엄마가 자신을 잃고 슬퍼할 것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괜히 데려 나와 잃어버린 죄책감에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인과의 관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삶이 엉망이 됩니다. 25년이 지난 뒤 라이언은 엄마를 다시 찾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구글 지도가 인터넷에 올라왔고 그는 구글 지도를 통해 자신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주위를 뒤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의 기억에 있는 동네와 똑같은 곳을 발견합니다. 

25년 만에 엄마를 만나 처음으로 한 말은 죄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다른 동네로 가지 않고 그 동네에서만 살았습니다. 불행히도 형은 25년 전 그날 동생을 찾다가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를 친어머니에게 소개해줍니다. 이제 진짜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키워준 부모님이나 그 부모님이 입양한 망나니 형까지.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낳아주시고 존재하게 하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만나기를 필요로 합니까? 어쩌면 마리아 막달레나만큼 예수님을 만나기를 희망한 사람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유튜브에서 보면 새끼 때 자기를 구조한 사람을 엄마로 믿는 새나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물들은 어미를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조금만 사랑을 준 대상이라도 부모로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많은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창조자로 여기고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한 유일한 분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벌면 되지’, ‘성공하면 되지’, ‘자녀를 잘 키우면 되지’ 등으로 각자가 삶의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그 공허함 속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끝까지 창조자가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를 보여주신 유일한 분을 사랑하기를 거부합니다.

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자신을 시궁창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채 그녀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찾으면 결국엔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그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형제도 존재하게 하신 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당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이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 뜻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믿게 하시고 부활의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활한 주님을 만난 사람의 회개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조한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기들이 버린 예수님께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머릿돌로 쓰실 돌을 버린 집 짓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렇게 귀한 돌인 줄 모르고 버린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구원자요 주님인 줄 모르고 버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는 것이 그리고 그분께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을 찾아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그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회개인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형제들에게로 가는 것이 부활한 주님을 이미 만난 자의 회개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그러나 당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놀랍게도 당신의 형제들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마리아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의 형제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처럼 파견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오늘 복음인 것 같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부터 당분간, 아마도 이번 달 말까지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번 달에 수녀원 연피정 동반을 해야 하는데 강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지금 <온라인 영성학교> 강의도 준비해야 합니다. 전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강의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전 강론 중 하나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이름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이름을 만남으로 되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운 이름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저마다의 소중한 이름입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이름을 사랑으로 불러주십니다. 이름에는 심장이 있고 함께 한 시간이 흐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가장 연약한 이름이 가장 사랑하는 이름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이렇듯 부활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름에 부활의 글을 쓰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 부활의 길입니다. 부활의 길은 끊임없이 새로운 현재의 길입니다. 같은 시각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더 깊어지게 하는 부활의 이름은 반가움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람이 반가운 소중한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 반가운 소식 반가운 이름입니다. 소중한 이름을 소중하게 부르는 너무나 반가운 부활 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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