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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09 (일) 부활절 미사 생중계 평화방송 명동성당

by 평화다방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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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시 살아나, 여전히 당신 안에 있나이다. 알렐루야.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어 주셨나이다. 알렐루야. 당신 지혜는 놀라운 일 이루셨나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 오늘 외아드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부활 대축제를 지내며 성령의 힘으로 새로워지고 생명의 빛을 받아 부활하게 하소서.

 

2023년 4월 9일 (일) 주님 부활 대축일 평화방송 명동성당 온라인 생중계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9일
부활절 미사 생중계
평화방송 명동성당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오늘 성경 말씀 카드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8)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8)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0,34ㄱ.37ㄴ-43)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 제2독서
    (콜로새서 3,1-4)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9일 (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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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그리스도 우리의 파스카 양으로 희생되셨으니 주님 안에서 축제를 지내세.

 

 

복음
요한 20장 1-9절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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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부활절 매일미사

 

 

2023년 4월 9일 (일)
주님 부활 대축일
김영진 바르나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53

📌 강론시작 16:43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생중계

 

 

2023년 4월 9일 (일)
주님 부활 대축일
명동성당 평화방송 생중계 12:00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명동성당 부활절 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2023년 4월 9일 (일)
주님 부활 대축일
명동성당 10:00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부활절 미사

 

 

2023년 4월 9일 (일)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팔로티회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된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경축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에서, 교회는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부활 이야기, 곧 빈 무덤 이야기를 선포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요한을 비롯한 복음사가들이 모두 전하고 있는 이 빈 무덤 이야기를 바탕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1코린 15,3-5 참조).

빈 무덤 자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입증하는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부활 사건에 대한 표징이자 증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누워 계셨다면 부활에 대한 복음 선포는 가능하지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은 비어 있는 것입니다. 빈 무덤의 발견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40항 참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베드로에 이어서 무덤에 들어간 뒤에야 보고 믿었습니다(20,8 참조). 그가 본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입니다. 그러나 그는 빈 무덤을 보고, 이 징표를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너머에 있는 실재,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부활의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절망과 죽음의 공간이었지만, 그 무덤은 생명과 희망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더 이상 어둠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그곳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음이 근육에 미치는 영향 테스트

 

이탈리아 과학자 새무엘 마코라는 럭비 선수들을 대상으로 탈진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마음이 근육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최대 에너지의 80%에 해당하는 강도이자 평균 242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수준으로 약 10분간 사이클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탈진한 상태가 확인되면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즉, 완전히 탈진해서 도저히 사이클 페달을 밟지 못할 상태가 될 때까지 타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하나둘씩 포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연구진은 딱 5초만 더 힘껏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5초 동안 그들은 평균 731와트의 전력을 생산했습니다. 마코라 박사와 그의 연구진은 선수들이 포기한 이유가 근육이 물리적으로 운동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이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자각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연구 내용이었습니다. 최대로 노력했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면 그때가 되어서야 여전히 더 노력할 힘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지요. 이처럼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노력해도 안 된다며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힘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셨고, 특히 당신의 부활을 통해 충분히 용기를 낼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포기를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고 다시 해 본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포기했을 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커다란 슬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작용해서 사람을 피해 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무덤을 비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과 함께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힘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부활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운명을 개선해 주지 않을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부활을 갈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부활과 재생은 다른 말입니다. 라자로는 재생하였습니다. 방전된 배터리가 다시 충전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시 충전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되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자연계 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모든 것들은 다 죽어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죽습니다. 다만 인간을 위해 봉사하다 죽어가는 것들은 인간이 최대한 다시 되살려냅니다. 스마트폰을 충전시키고 액정이 깨지면 다시 교체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봉사와 재생의 삶을 반복하다가 저절로 부활이 믿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은 죽음과 부활의 연속입니다. 고정원 씨는 자기 가족을 죽인 유영철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를 받고 자기를 봉헌했더니 용서의 마음이 생겼고 다시 살아나 유영철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사랑으로 내가 죽으니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인간보다 돌아가신 그분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완전히 죽어 소멸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벌써 부활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들이 무덤에서 만난 천사들은 갈릴래아로 가면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함은 이웃사랑입니다. 그녀들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삶이 갈릴래아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 안에서만 믿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부활을 전한다는 말은 우리도 그러한 존재임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르치려는 사람이 더 많이 배웁니다. 흘려보내려는 것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져서 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하려고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믿음’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죽음으로 훌륭한 인간이라는 믿음을 줍니다. 이것이 ‘자존감’이 되고 그 자존감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귀한 존재임을 믿게 하려면 먼저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숨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은 자녀에게 자신들의 살과 피로써 전해집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도 하나의 투자입니다. 투자는 이익을 전제합니다. 이익 없이 투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삶은 무언가를 위한 투자입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이 죽음은 돈이 되었건, 쾌락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무언가를 위한 투자가 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돈에 생명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사랑에 투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 투자하려는 사람은 그 이익을 기대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줌이기 때문에 부활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하려는 이에게 그 보상을 확실히 믿게 해주십니다.

백종원 대표가 망해가는 식당에 찾아가 그들에게 비법을 전수해줍니다. 만약 그들이 백종원 대표의 레시피를 전수하고 싶다면 그 식당은 대박이 납니다. 하지만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면 대부분 식당은 이전의 자기 방식대로 되돌아갑니다. 백종원 대표는 자살 직전까지 갔다가 요식업으로 부활한 사람입니다. 이웃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사람은 그의 레시피를 따르고 그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돈이 우선이라 요령을 부리는 집들은 폐업에 이르게 됩니다. 

영화 ‘미녀와 야수’(2017)는 자기만 알던 왕자가 야수가 되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던질 때 그 저주가 풀린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죽음의 저주도 기꺼이 내어줄 때 풀립니다. 부활은 사랑하려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부활을 갈망합니다. 갈망할 수 없으면 투자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사랑하면 믿어지고 안 하면 안 믿어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원의 문을 여는 주님,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 부활 

 

오늘 저는 강론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영원의 문을 여는 주님 부활,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우리 부활" 

그런데 저는 저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으로 강론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제가 아직도 육신 형제들의 영향을 더 받는 점, 그러니까 육신의 형제건 아니건 똑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점입니다. 

죽음이 저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게 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지인들의 죽음과 수도원 선배들의 훌륭한 죽음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죽음들에게서 영적인 교훈은 많이 얻었지만, 저의 어머니 죽음에서처럼 죽음이 제게 가까이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이제 저의 육신 형제들이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 있습니다. 누나, 매형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이번엔 제 형이 암수술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그런가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남의 일이 아니었지요. 

마침 형의 수술 날이 그저께 성금요일이었습니다. 성금요일에 수술하였으니 주님 부활 대축일에 다시 살아나길 기대했고, 그런 마음으로 성금요일 저는 여느 해처럼 걷는 십자가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걸으며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부활이 고작 육신의 부활이야?! 고작 육신만 치유되는 부활이란 말이야?! 그래봤자 몇 년 더 살다가 죽는 거잖아?! 

사실 암은 의사도 고칠 수 있는 겁니다. 요즘은 로봇이 더 잘 수술할 수도 있다지요. 그래봤자 몇 년 더 사는 것이고, 영원히 사는 부활은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서 어제 로마서를 읽으니 다음 구절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가 바라고 기도해야 할 것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 그 자체가 아니고, 하느님 없이도 기사회생하는 부활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이 부활 대축일에 가장 바라고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서 부활하시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가 오늘 로마서가 얘기하듯 바로 이것이지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냐고 묻는데 저는 또 한 번 부끄러움 느꼈습니다. 솔직히 제가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정도로 알았지 주님과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아주 밀접하고 인격적인 세례는 아녔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죽고 이렇게 부활해야 주님과 함께 영원히 부활하게 되겠지요. 

사실 하느님의 창조와 주님의 강생과 우리의 세례와 부활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다가 끝나라고 창조하지 않으셨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라고 오시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고, 죽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고, 그것만을 위해 주님이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내려오실 필요가 없지요. 

주님께서 오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신 것은, 이 세상에서는 물론 저세상까지,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원히 우리가 행복하게 살라심이며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으니” “저 위의 것을 추구하라.”고 얘기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하늘과 영원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 세상에서 하늘과 영원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영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고 하늘의 문을 열어주셨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을 갈망하고 저 위의 것을 추구합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내 옆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지금 한창 푸르러지는 나무들보다 더 활기차시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들보다 더 아름다운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날마다 부활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합니다. 부활은 유죄와 무죄 참과 거짓의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열어줍니다. 다양한 체험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부활은 가두어 둘 수 없는 사랑과 생명의 기쁜소식입니다. 

부활은 사랑으로 부활의 체험에 도달하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경쟁과 패배의 시각에서 벗어나니 따뜻한 사랑이 보입니다. 사람의 따뜻한 부활은 사랑입니다. 부활 앞에서는 사랑받는 제자와 베드로 모두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부활이 울려퍼집니다. 부활을 통해 사랑을 일깨워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계셔 참 행복합니다. 새로운 삶의 안목 사랑의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부활의 힘찬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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