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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22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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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주님,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로 저희 안에서 죄의 율법을 없애셨으니 저희에게 지워진 그 멍에도 치워 주소서.

 

2023년 4월 22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21)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21)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6,1-7)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오늘 복음
    (요한 6,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22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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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만물을 지으신 그리스도 부활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네.

 

 

복음
요한 6장 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22일 (토)
이나라 사무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22일 (토)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38

📌 강론시작 16:2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2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20

📌 강론시작 12:5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2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4:26

📌 미사시작 1:04:33

📌 강론시작 1:11: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에 관한 어제 복음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두 복음은 같은 날, 곧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어느 날에 일어난 두 가지 다른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지어 함께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특별히 “나다.”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등장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 양식과 같습니다(탈출 3,14; 이사 43,10-11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신원을 밝히고 계십니다. 

이와 함께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불신을 버리고 확신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이해하려면 그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은 어두운 저녁에 큰 바람으로 거칠게 출렁이는 호수 위에서 펼쳐집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설정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혼란과 위험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다가가 당신의 신적 정체를 드러내시며, 그들을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마주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어둠과 죽음, 공포와 두려움에 빠진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과 위로는 위기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과 함께하는 삶

 

쉼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정신없이 바쁩니다. 조금 쉬면서 일하라고 하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삶을 즐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삶의 여유가 생겼을 때 즐겼던 것보다, 삶이 고단할 때 마주한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시간이 더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췄지만, 그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꼭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출발 전까지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제가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지순례를 다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지순례를 통해 얻은 힘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살 수 있었습니다. 
 
삶이 고단할 때 오히려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나의 삶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드는 시간임을 깨달을 때 지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유’가 지치지 않는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열정적인 삶을 만듭니다. 
 
우리의 삶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보시니 참 좋은’ 참이 될 수 있을까요? “힘들어, 어려워”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고단하게 만드는 삶이 아닙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드는 삶이어야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유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지금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고 그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 나의 주님이며, 이웃이 나의 주님이며,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어디서도 누리지 못했던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작은 배에 탄 채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 모습에 제자들은 주님이 아닌 유령인 줄 알고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 상황이 지금의 우리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과 같은 고통과 시련으로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움 속에 빠질 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 뵙고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하려는 마음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에만 집착하며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희망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 콜레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를 영하는 마음과 잠을 청하는 마음은 같다.

 

저는 성체를 영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을 먹이시고 이어 오늘 복음처럼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같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40년을 버틸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은 마치 풍랑 가운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처럼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남도 처음엔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걱정, 근심, 두려움, 염려를 당신만 받아들이면 사라지게 하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을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는 곳에 가 닿았다고 말합니다. 더는 큰 바람이 일으키는 큰 물결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과 근심은 내가 죽어야만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해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는 그렇게 내가 죽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저는 성체를 영하는 이 순간이 ‘잠’을 자기 전의 기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잠은 상당한 모험입니다. 잠은 죽음과 가장 가깝습니다. 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을 청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잠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날 상쾌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힘 있게 하루를 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잠에 관한 두 개의 영화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슬리핑 뷰티(Sleeping Beauty)’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루시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입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월세도 못 낼 정도입니다. 그런데 고액 알바가 들어옵니다. 그냥 수면제를 먹고 한숨 자고 나오면 됩니다. 신체의 어떤 손상도 입지 않습니다. 그녀는 점점 부유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알바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자신이 잠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알고 봤더니 돈은 많지만 잠이 오지 않는 노인들이 자신 옆에서 잠을 청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노인들은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다윗도 젊은 여인을 옆에 두고 잠을 청했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떤 노인들은 그녀 옆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잠이 곧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모험을 하려면 자신을 언제나 받아줄 것만 같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노인들은 잠자는 젊은 여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영화는 ‘세븐 파운즈(Seven Pounds)’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7명의 가족과 애인을 잃게 됩니다. 잠도 안 오고 두려워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사람이 일곱이니 자신도 일곱 명에게 새 생명을 주기로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심장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심장을 내어주며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잠이 들기 전에 내 죽음을 책임져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위 영화에서는 자신을 받아줄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잠 자기 두려운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물에 빠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죄책감’ 없이 죽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세븐 파운즈에서는 일곱 명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며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성체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가 다니라 그분이 의로우셔서 우리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과 죄책감을 성체로 해결하면 우리는 편하게 잘 수 있고 편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진정한 목적지입니다. 결국 우리 모든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편하게 잠들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안에 성체로 들어오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안전하게 하느님께 가는 공동체 .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오늘 제자들 공동체는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어찌 주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들끼리 출발합니까?,주님 없이 가면 어디로 갈까요? 제대로 갈 수 있을까요? 

제자들 공동체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주님을 모셔 들여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 늦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배에 모셔 들이려고 했을 뿐인데도 제자들의 배는 이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이 풍파를 만난 것은 어쩌면 자중지란, 곧 외부 풍파가 아니라 내부 풍파일지도 모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하듯 말입니다. 

구심점인 선장이 없으면 이리 가야 한다는 사람과 저리 가야 한다는 사람으로 배가 표류하고 심지어 산으로 올라가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께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느님께 가는 길을 제일 잘 아시는 주님을 모셔 들여야, 아니,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께 가는 길이신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안전하게 하느님께 가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기도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걱정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의논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불평하고 싸움이나 하는 공동체가 아니어야 함은 물론이고,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 공동체가 안전하게 하느님께 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초대 공동체처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사람들을 잘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오늘 초대교회 부제들처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속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은 우리 공동체를 세속적으로 이끌 것이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야 공동체가 영성적 공동체가 되도록 이끌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성적 공동체는 율법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를 이끌 봉사자들은 아무리 열심한 사람일지라도 주님께서 그토록 나무라신 율법 학자와 같은 사람이어선 안 될 것입니다. 

차라리 덜 열심하더라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 낫고, 어수룩한 구석이 많아도 겸손한 사람이 낫고,,그러면서도 오늘 봉사자들처럼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식별할 줄 알고, 우리 공동체가 영적 공동체가 되기 위해 늘 영적으로 식별할 줄 알며, 거짓 열성과 성령에 이끌리는 열성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없이 떠나는 공동체입니까? 초대교회 공동체입니까? 

우리 공동체는 초대교회처럼 기도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인간적으로 근심하고, 의논하고, 그러다 다투기나 하는 공동체입니까? 

더 중요한 것, 나는 공동체를 위해 종종 기도합니까? 

아니면 불평을 더 많이 합니까? 

내가 공동체 봉사자라면 어떤 봉사자입니까? 

영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신앙은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이를 먹고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우리들 내면의 풍경이 바로 풍랑입니다. 뜨거운 심장만큼 뜨거운 믿음이 필요한 우리의 삶입니다. 

거센 풍랑의 시간 없이 풍요로운 믿음에 이를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밤에도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믿음을 사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시듯 호수 위를 걸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믿음 안에서는 폭풍도 축복이 됩니다. 풍랑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깨끗하여 지는 순간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탈출기의 서막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어둠을 극복하고 시련을 극복하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찔리고 아파하며 우리의 믿음은 탈출기의 믿음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를 묻는 새로운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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