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06 매일미사 오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6.
반응형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로우시다.

주님, 주님을 믿는 저희를 인자로이 비추시고 주님 영광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히시어 저희가 구세주를 올바로 알아보고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2023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1서.5,5-13)
    성령과 물과 피.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1,7-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6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복음
마르코 1,7-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6일 (금)
이현진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6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6일 (금)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마르코 복음서를 시작하는 이 표현은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자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 마르코 복음의 목적입니다. 이에 맞게 복음서는 두 번에 걸쳐 신앙 고백을 전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 

다른 하나는 십자가 곁에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두 인물의 신앙 고백은 마르코 복음의 핵심이며, 위치상 복음서의 중간과 마지막에 자리하여 복음서의 시작과 함께 큰 축을 이룹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지이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이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다른 이들이 받아야 하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몸소 보여 주신 본보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 뒤의 모습은 웅장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구약 성경의 전통을 따르면서 복음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예수님의 호칭이자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

 

성지를 산책하다가 문득 처음 성지개발을 시작했던 2004년 1월이 생각났습니다. 혼자 와서 성지의 황량함에 참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성당도 없고, 사제관도 없었습니다. 야외에는 나무도 거의 없어서 부족함 그 자체가 갑곶성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봄에 선배 신부님께서 성지가 너무 휑하다면서 벚나무 15주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직접 땅을 파서 심으면서도 이런 척박한 땅에서 과연 나무들이 잘 자랄까 싶었습니다. 이 벚나무를 시작으로 계속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자갈 많은 척박한 땅이라 죽는 나무가 더 많았습니다. 
 
올해가 2023년이니, 벌써 20년이 되어갑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성지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은 변하지 않을까요? 30대의 젊고 열정이 넘쳤던 저 역시 변해서, 게으른 50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변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이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면서 다른 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부정하고 자기 고집만을 내세웁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당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가득 받고 있었던 요한입니다. 그래서 섬김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을 겸손하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큰 겸손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겸손함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렇게 겸손함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나의 겸손함으로 이웃의 변화,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자기를 이기는 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끝없이 배우는 자, 가장 부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할 줄 아는 자,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번 감사하며 사는 자.

- 탈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법 : 요한의 세례를 청하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새로 나야 할 필요성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다리는 현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공적으로 드러내시는 주님을 만나느냐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성령을 만나시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보다 낮아지는 방법입니다. 

우선 복음을 전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준다는 말은 공범이 된다는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되 그 대상보다 낮아지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나려면 복음을 전하되 가장 보잘것없는 이보다 자신이 죄인이라 인정해야 합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는 가난하고 병든 한 장애가 있는 형제를 돌보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 화장실도 없는 성남 지하 단칸방에 들어갈 때는 요강과 청소 안 된 방에서 풍기는 냄새에 토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요강을 비워주고 설거지를 해주고 방 청소를 해주니 마지막으로 그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었음이 미안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악취로 끌어안기 거북했지만 이내 안고 나니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으로 그분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이, 그 가장 보잘것없는 이와 내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낄 때 주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차인표 씨의 예도 들어봅니다. 모태 신앙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습니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예수님에 관한 뮤지컬도 일부러 4년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대신 가난한 아이들을 만날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람들과 섞이기 싫어 일등석을 타고 가서는 인도하는 목사님에게 너희들은 귀중한 존재이고 사랑한다고 말을 해 달라고 부탁받습니다. 한 꾀죄죄한 하이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이고 너를 사랑한다.”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주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특별한 존재라고 여길 때도 그 사람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나보다 나아 보일 때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이런 만남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차인표 씨의 아내 신애라 씨는 처음엔 차인표 씨를 무척이나 판단하고 정죄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이랬다고 합니다. 

“너나 잘해!”

성령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해야 할 때 그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타이베이 대교구 주보에 실렸던 고 산궈스 바오로 추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중에 이뇨제 처방받고 미사 하다가 오줌을 누기도 대변을 흘리는가 하면 수술대 위에서 소변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골고타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웃을 통해 나 자신이 별거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자유롭고 싶다면 주님께서 분명 만나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 하는 자세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해주십니다.

정리하자면, 이웃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면 먼저 복음을 전하려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큰 죄인임을 마음으로 고백하려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고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싸워야 한다,  싸우되...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싸움의 고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하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여기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될까요? 

예를 들어, 세상의 불의가 있는데 이 불의에 대해,우리 교회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우리 신앙생활만 충실히 하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도 세상을 이기는 고수의 방법일까요? 

오늘 독서도 이와 비슷한 뜻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건가요? 이런 뜻이라면 일제 강점기 우리 한국 교회가 취한 태도와 비슷하고, 지금도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침묵하라고 하는 많은 신자의 주장과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교회는 일제의 억압과 만행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외치며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조차 불허했는데 이것은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의에 침묵한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재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고,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침묵할 것을 독재정권은 강요했고, 일부 신자도 같은 논리로 사회 문제나 불의에 교회가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잘 알아야 할 것은,,교회가 사회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지 복음적으로 증거하고 싸우는 것까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도 세상과 싸우지 않으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와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진정 사랑한다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싸웁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이요, 메시아라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둘입니다. 물의 방법과 피의 방법입니다. 

박해시대 때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 하는 것과 복음적인 삶으로 신앙을 증거 하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었듯이 말과 행위로 그러니까 삶으로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물의 방법과, 어린 양처럼 피 흘리고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피의 방법 두 가지입니다. 

간디가 불의와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다만 비폭력적으로 싸운 것뿐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랑하셨기에 싸우셨고, 사랑으로 싸우셨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의 죄와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개인의 죄든 세상의 죄든, 비겁하게 못 본 척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되 감정적 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폭력적으로 싸우지 말고, 이념적 정치적으로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면 됩니다. 

사랑 때문에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는 것이 최고수의 싸움임을 한 수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