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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02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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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1월 2일 (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 1서 .2,22-28)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2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복음
요한 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2일 (월)
강인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2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2일 (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모습에 감탄합니다.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 화장실도 너무 청결하다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쇼핑몰 같다고, 지하철도 너무 편안하다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의 인심도 너무 좋다는 식의 칭찬 일색입니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모습이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건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부위가 생겨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했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건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핍을 체험해야 감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결핍을 체험하기 전에 미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힘차게 그리고 현재의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어떻게 알았는가? 당신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가 바로 ‘나’ 맞소.”라고 말만 해도 사람들의 엄청난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답변하지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렇게 답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몫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고, 교회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쪽 행복의 문이 열린다. 하지만 닫힌 문만 오랫동안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 열린 문은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 헬렌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안에 머문다며 안주하지 않는지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답하고, 프란치스코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뒤 길을 가던 중 강도로부터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란치스코도 서슴지 않고 답하였지요.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아마 성인들은 다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성인들이 저는 오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저는 부럽습니다.’라고 한 것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 부럽다는 느낌이 다분히 있지요. 

그러니까 전엔 저도 제가 누군지 서슴지 않고 답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제가 지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부끄러우면서도 부러운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지금이 더 마음 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제가 서슴지 않았던 것은, 성인들의 서슴지 않음과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섣부른 자신감이었거나 교만한 자기 정체 의식이었고 지금의 제가 오히려 겸손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나는 프란치스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고, 

그런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에서 의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제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면에서 부끄럽고 그래서 지금은 서슴지 않을 수 없고 망설입니다.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이 없고, 

꿀리는 것이 없고, 

켕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고,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의 이런 제가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편함의 한 자락은 이런 저에 안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자락은 겸손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까치발을 하고 서 있던 제가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과 같고, 적어도 더 이상 까치발은 하고 있지 않은 그런 편안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의 겸손은 저의 바닥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바닥에 편안히 머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의 편안함은 오늘 서간의 당부대로 하느님 안에 제가 편안히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지 않고, 하느님께 단단히 정박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설들에 이리저리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서간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편안함은 좋은 것이지만 편안함에의 안주는 나쁜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안에 머문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는 안주와 특히 죄에의 안주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흐르지 않고 고여있으면 수도 생활도 썩어 갑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신앙의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마음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자존심과 고집 허세와 부정직의 그림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행복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반은 믿음의 본질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있는 그대로를 보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이겨내고 뛰어넘는 겸손입니다. 모든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감사와 은총이 될 것입니다. 현실에 충실한 삶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이란 우리자신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참된 자유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자기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고 가벼워지는 자유를 따릅니다. 우리의 삶을 깨우시는 분,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 하나씩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실천하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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