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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03 매일미사 오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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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성자께서 거룩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저희와 똑같은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그 창조의 능력으로 저희가 옛것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

 

2023년 1월 4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 1서 2,29―3,6)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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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3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복음 (Gospel)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

 

 

복음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4일 (수)
박원재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4일 (수)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4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십자가 죽음의 의미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정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유다교에서는 파스카 준비일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에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을 잡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를 향하여 가셨다고 말합니다(19,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그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19,36 참조). 

이 말씀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을 피하고자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통째로 구워 먹어야 하였으며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표시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치실 때 그 집을 지나가십니다. 이 사건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파스카의 어린양과 비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 사건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 죽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데.

 

1981년 미국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존 힝클리(John Warnock Hinckley Jr.)가 쏜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실려 가면서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병원에 도착해서 간호사가 지혈하기 위해 손을 몸에 대자, “아내 낸시에게는 허락받았나요?”라고 말했고, 수술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이 공화당원이면 좋겠네요.”라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사실 당사자인 레이건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도 여유를 보여줌으로 인해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83%의 높은 지지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지율이 30%로 떨어지자, “또 한 번 총 맞으면 되지, 뭘.”이라고 걱정하는 참모진에게 말한 것도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렇게 그는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만약 자기 자신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유머를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주변을 배려하는 말을 통해 자신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고, 그것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자기 PR 시대라고 하면서 나를 드러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하지만,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을 드러내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광야에 나가 메뚜기와 벌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만 베풀 뿐이었습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 한 번도 취하지 않고 철저하게 예수님께만 시선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1요한 3,6)라는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역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만을 증언하고 높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높이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증언해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대여, 그대가 갖지 못한 것을 상상함으로 인해서 그대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훼손하지 말라. 그대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과거 한때 그대가 갖기를 열망했던 것임을 잊지 말라.

- 에피쿠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겪어보면 보이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인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입니다.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드러내 보이셨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보라고 하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말합니다. 보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해서이고, 겪어봐도 오해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전에 합천 우체국 택배 배달이 시작되면 이런 문제가 보내집니다. 

“누구님이 보낸 택배 배달 예정. 합천 우체국 오세용.”

많은 사람이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항의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자를 보내는 분이 우체국 직원 오세용씨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제대로 보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컬투쇼에 나왔던 사연입니다. 집 근처 주유소에 알바 하는 남자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 눈도장도 찍을 겸 매일 휘발유 1리터씩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경찰들이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유소 알바생은 그 여학생이 유력하다고 증언해 1차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용의자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겪어봐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겪어본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겪어 ‘본다’라고 하듯, 머문다는 말은 ‘본다’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요한은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그리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야 머무는 힘을 줍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희망이 그들을 성전에서 평생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바라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보게 되고 보면 믿게 됩니다. 

페르시아전쟁 때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막대한 보물을 파묻어놓고 전사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테베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신전에 빌자 제우스가 말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돌을 뒤집어보라.”

노력하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면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머물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 5분도 안 읽고 기도 5분도 안 하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문다고 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오래 같이 살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를 모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만, 혹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와서 평일 미사에서도 봉헌금을 걷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잘 알고 오랜 세월 알아 왔는데도 혹시 돈을 많이 걷어서 제가 어떤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성전도 최소한으로 지어야 하고 성당에서 걷은 돈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를 위해 다 쓰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그분은 제가 돈을 많이 걷어서 저의 영광을 위해 쓴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의 도구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가득 차 있으면 어둠만 보이고 빛이 있으면 빛이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보려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보려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봅니다.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려면 머물려야 합니다. 머무르되 사랑을 증가시키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이고 보면 증언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으로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당신께서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도 볼 줄 안다고 말하면 죄인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어제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고 말한 세례자 요한이 오늘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제는 누구신지 알게 되었지만,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고, 모르다가 알게 되기까지 사이에 성령의 작용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도 그렇고,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성령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A.I(인공 지능)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을까? 우리 인간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잘 알고 있을까? 

몇 년 전 인간의 지능과 인공 지능 간의 대결이 바둑을 통해 이뤄졌고, 인간이 인공 지능에게 진 것이 크나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으며 그때부터 바둑 해설을 할 때 인공 지능의 해설을 꼭 곁들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인공 지능이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그리고 많이 알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공 지능이 더 잘 알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인공 지능의 증언에 의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만일 그런 것이고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믿음도 성령이 아니라 인공 지능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학자들 안에서 인공 지능 시대의 신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고,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현재의 저의 생각으로는 인공 지능이 신앙의 부분에 답할 수 없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인가?’와 같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공 지능이 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적인 앎이나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영역이기 때문이고,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다른 부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모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안다고 까불다가 믿지 못하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다가 정작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을 믿으면 난리 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나 자기 꼬라지를 아는 사람, 아니, 인간의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알고, 인간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하느님임을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가 아니고 하느님임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는 이 세상 너머의 것이니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과연 나는 보았다.

 

주님을 제대로 본 사람은 주님의 삶과 우리자신의 삶을 하나의 복음으로 엮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소중한 만남입니다. 절실한 희망이 절실한 주님을 체험케 합니다.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은 우리존재의 뜨거운 만남입니다. 뜨거운 만남은 오늘의 현실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믿는 만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실천입니다. 올바른 실천의 시작은 우리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본다는 것은 삶의 가치관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참된 변화는 주님의 삶을 만나고 보는 것에서 변화는 일어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절실한 고백에서 뜨거운 사랑을 만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찾아야 보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믿게 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은 생명이며 생명이란 주님을 믿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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