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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05 매일미사 오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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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처음 시간이 생기기 전, 말씀은 하느님이셨네. 그 말씀이 세상의 구원자로 태어나셨네.

하느님, 외아드님의 탄생으로 신비로이 인류 구원을 시작하셨으니 하느님의 종들에게 굳은 믿음을 주시어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2023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 1서 3,11-21)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43-51)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23년 1월 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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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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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요한 1,43-51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5일 (목)
박원재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5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5일 (목)
매일 오후 3시 시작합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와서 보시오.

 

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부르십니다. 그 뒤에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만납니다. 나타나엘은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지만 많은 사람이 나타나엘을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생각합니다(마르 3,18 참조). 필립보는 증언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은 예수님의 새로운 호칭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모세의 율법서(오경)와 예언서 전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요한 복음의 독창적인 시각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엘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시오.” 

이렇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 표현도 나타나엘의 신앙 고백이면서 증언입니다.

증언을 강조하는 요한 복음 1장은 복음서의 시작에서 예수님의 다양한 호칭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전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메시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이스라엘의 임금님. 우리에게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이 모두는 예수님에 대한 심오한 묵상을 담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표현입니다. 요한 복음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건을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미리 알려 줍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이처럼 고백하며 다른 이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우리의 결단과 의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은 전염된다.

 

행복은 전염된다고 합니다. 이는 실제로 많은 학자의 연구 조사로 밝혀진 결과입니다. 이 행복은 반드시 접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행복이 있으면 전파되어 행복 지수를 높여줍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자신이 행복하면 내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5%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행복하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0%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어떻게 될까요? 0%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6%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행복을 나와 직접적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예수님과의 만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자기 생각을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곧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神性)이 전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막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역시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한다면 분명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 행복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느님 자신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악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라 또 보라.

 

성탄 시기에 들어와 우리가 계속 읽는 요한복음 1장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말씀이 이 세상에 오신 얘기로 시작되는데 말씀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도 맞아들이지도 않았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주님을 증언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아 그리스도이신지 궁금하여 묻습니다. 

그저께 복음에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답하고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재차 묻자, 요한은 다시 “아니다.”라고 답하고, 다시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어저께 복음에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요한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똑같은 증언을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탄생하시어 사람들 가운데 오신 주님을 사람들이 몰라보고 자기를 향하자 거듭 자기가 아니라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또 “보라” 

이 두 번의 초대에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이 갈립니다. 본 사람이 제자들이고 보지 않은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 보고 주님을 따라간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보지 않고 그래서 돌아선 사람은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보는 것은, 제자 되는 것의 시작, 곧 출발점입니다. 흘깃 보든 똑바로 보든 보는 것이 소위 관상이고, 관상이 제자 되는 것의 시작이요 출발점입니다. 

그래도 제자가 되려면 제대로 보기 위해서 방향을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흘깃 보든, 곁눈질로 보든, 지나치며 보든, 정면으로 보지 않던 사람은 방향을 틀어 주님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따라가야 합니다. 먼발치에서 또는 먼빛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려면 가까이 다가가 또렷이 봐야 하고, 더 나아가 함께 살며 주님을 더 그리고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觀察), 이것이 관상의 더 깊은 단계이고, 이것이 어쩌면 클라라가 얘기하는 관상의 두 번째 단계 곧 “Considera”의 단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은 관찰을 통해 통찰하게 되었을 것이고, 스승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심증을 확실히 갖게 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다른 제자들도 데리고 가 주님의 제자가 되게 했을 겁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이 보라고 한 대로 봄으로써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우리도 보라는 주님은 보지 않고 세례자 요한만 보고 돌아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를 먼저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여정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한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방향을 틀어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 또한 마음을 정해야 하는 마음의 길입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우리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거짓을 이기는 빛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곳과 저곳이 이것과 저것이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목 말라하는 나타나엘에게 먼저 마음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비로소 여기까지 왔어야 알게 되는 사랑입니다. 하늘의 사랑은 우리 삶의 출구와 입구를 비추어 줍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 맑은 복음입니다. 

사랑이 함께 하심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기쁜 새날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우리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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