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08 매일미사 오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8.
반응형

 

보라, 만군의 주님이 오신다. 그분께 나라와 권능과 권세가 있다.

하느님, 오늘, 별의 인도로 성자를 이민족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믿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끄시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2023년 1월 8일 (일) 주님 공현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60,1-6)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 제2독서
    (에페소서 3,2.3ㄴ.5-6)
    지금은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되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8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는 동방에서 주님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복음
마태오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8일 (일)
양요왕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8일 (일)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8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임금이신지.

 

“너의 빛이 왔다” (이사 60,1).

이 말씀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요약해 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빛이 모든 이에게 드러나는 사건이 공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예언은 마태오 복음과 놀라울 정도로 상응하며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빛은 동방을 비추는 별로, 빛을 향하여 오는 모든 이는 동방의 박사들로, 민족들의 재물은 박사들이 바치는 예물로, 그리고 기쁜 빛은 예수님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는 박사들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두 임금을 대조합니다. 지금 유다를 다스리고 있는 헤로데와 새로 태어난 임금이신 예수님입니다. 임금은 구약의 예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통치자를 나타내는 표상이자 유다인들에게 메시아를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을 찾습니다. 한편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 때 그분의 죄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37). 

마태오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가져올 임금, 곧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죽음을 맞으십니다. 임금의 탄생이라는 기쁨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거친 외침으로 바뀝니다. 

박사들은 임금께 예물을 바치며 경배하지만, 그 임금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영광에 싸인 임금의 탄생은 처절한 죽음으로 끝납니다. 


한 분이신 같은 임금이시지만 누구에게는 예언의 성취인 반면에 다른 이에게는 신을 모독한 자입니다. 임금이라는 같은 낱말을 사용하는 역설입니다. 복음서는 마치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임금이신지’를 묻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물쭈물하면서 똑 부러지게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짝짝이 신발을 신어야 한다.

 

미국의 40대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어렸을 때 일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새 구두를 맞추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구둣가게에 갔습니다. 수선공은 레이건의 발 치수를 잰 뒤에 구두 앞이 둥근 것과 각진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둥근 것을 선택할지, 남들과 다른 특별하게 보이는 각진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되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망설이자, 구두 수선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일주일 뒤에 구두를 찾으러 오너라. 내가 만든 대로 구두를 신으면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일주일 뒤에 레이건은 완성된 구두를 보고 크게 실망했고 화가 났습니다. 완성된 구두의 모양이 한쪽은 둥글고 다른 쪽은 네모난 짝짝이 구두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 모습을 본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물쭈물하면서 똑 부러지게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짝짝이 신발을 신어야 한다.” 
 
이 경험이 큰 교훈이 되어 레이건 대통령은 남에게 결정을 맡기지 않았고 스스로 신속하게 결정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결정이 놓여 있습니다. 그때 이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미루다가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선택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일할 때이고 돈 벌 때라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뒤로 미룹니다. 나중에 한가해지고 할 일 없으면 그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뒤로 미룬 선택으로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신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당신을 드러내셨음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야 나의 구원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런데도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곧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그 먼 곳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이방인인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과는 달리, 헤로데는 자기 지위가 영원하길 바라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만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 무죄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엄청난 범죄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선택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좋아하실 선물을 마련하십니까? 그 선물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위에 주님의 영광이 떠오를 것입니다(이사 60,1 참조).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교회는 언제나 성경들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

- 계시헌장, 21항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찬송할 때 하느님 체험을 가장 많이 하는 이유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가장 중요한 요건이 남았습니다. 바로 ‘경배’의 조건입니다. 지금까지 한 주일 동안 묵상한 것을 다 잊어버려도 오늘 것만 기억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경배’에 모든 조건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경배하다’란 단어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직역하면 ‘~ 앞에서 무릎을 꿇다’란 뜻입니다. 전에도 체나콜로에서 만난 페데리코 청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으로 체나콜로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청으로 세 달면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으로 미사 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거의 마지막 미사에서 자신도 무릎을 꿇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때 체험한 느낌은 ‘평화’ 자체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그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 그렇게도 나가고 싶었던 공동체에 3년 이상 머물고 있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찬미하려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실까요? 단순합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자신을 의사로 인정하는 이에게 의사가 됩니다. 한 번은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서 이러저러한 것을 의사 앞에서 아는 척을 했더니 의사는 당신이 의사냐며 그러면 왜 찾아왔느냐는 듯이 기분 나빠했습니다. 그러면 그 의사의 능력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왔습니다. 황금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황금을 봉헌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모든 것의 주인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십일조로 주님을 찬미하는 이에게 당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더 많은 은총을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유향은 ‘기도’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하느님으로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몰약은 ‘죽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으려면 그 상대가 생명이셔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동시에 봉헌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우리가 다윗처럼 우리 자신을 버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주님을 찬양할 때입니다. 다윗이 은총을 받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찬양으로 환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찬양에서 주님을 만난 것은 남들이 찬양할 때 졸면서였습니다. 신학생 때 창세기 연수에 들어가서 남들 찬양할 때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컴컴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 이런 가사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저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처음으로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다시 받고 싶어서 지금도 찬양을 부릅니다.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찬양할 때 하느님 체험을 가장 많이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찬양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이것에 비해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그레고리안이나 모차르트의 곡에 가사를 붙여 부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새롭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자들 하느님 체험을 위해 주님을 경배하는 분위기를 더 많이 더 자주 더 정성껏 조성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로만 주님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고백해봅시다. 그러면 주님을 만납니다. 

지식채널e에서 ‘엄마가 울었다’의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입니다. 한 중학교에서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쓰고 오라는 실험 내용이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나중엔 부모님의 보지 못하던 면을 보고 집이 행복한 곳이 되었다는 줄거리입니다. 한 아이의 일기는 이렇습니다. 

“난 엄마 아빠와 같이 산다. 너무 당연한가? 우린 같이 산 지 얼마 안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엄마 아빠는 오랫동안 같이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돌아오셨다. 난 너무 기쁘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실 때 ‘엄마가 만든 음식, 매일 먹으니까 행복해요’ 엄마가 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아, 양파 때문에 그래.’ 나도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났다.”

자녀가 부모를 칭찬하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같습니다. 부모를 칭찬하니 부모의 참모습을 보게 된 자녀들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을 찬양하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뵈옵게 됩니다. 그러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에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억지로라도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모를 칭찬해 드리세요. 그분들의 진정한 면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이 당신 사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참빛의 진별이 되어 .

 

오늘 공현 대축일에 동방박사들이 빛이신 주님을 찾아와 뵙기까지 그 배경이랄까 상황은 어두움이고 그러나 하늘에 별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동방박사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직 주님을 뵙지 못한 사람들이고, 대신 어둠에 둘러싸여 어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빛을 포기하지 않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둘러싼 어둠은 어떤 어둠입니까?

첫째는 죄와 악의 어둠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참으로 죄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암울합니다.

둘째는 고통의 어둠입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인간관계도 힘들고,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닌데다 이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셋째는 알 수 없는 어둠입니다. 

이 악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둠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니 그 길도 모르는 어둠이요,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니 여기저기 방황하는 자의 어둠입니다.

이 모든 어둠이 합쳐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곧 절망의 어둠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한동안 이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계속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세상에서 하늘로 시선을 돌리고 어둠에서 별을 보기 시작했을 겁니다. 세상에서 해법을 찾을 수 없어 하늘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한 것인데, 그렇게 하늘을 보니 비로소 하늘에 별이 떠 있는 것이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 희망의 진실입니다. 밤이 돼야 별이 뜨고 밤이 깊어야 새벽이 오듯 인간에 대한 희망이 절망이어야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밤 중에 어둠을 보지 않고 별을 보는 것은 이제 희망의 시작일 뿐입니다. 밤은 어두움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별도 있음을 봤을 뿐입니다.

이제 별을 비추는 더 큰 빛을 봐야 하고, 별이 인도하는 더 큰 빛으로 나아가야 하며, 더 큰 빛을 본 다음에는 이제 내가 별이 되어야 합니다.

빛에서 빛을 받는 작은 별들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혼자 자기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별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과 나의 선행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빛날 때 그것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고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선을 가리키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말씀의 소리일 뿐이라는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 사랑 덕분에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나는 참 빛의 잔별일 뿐이라고 말이 아니라 행위가 말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라고 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귀담아듣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은 주님 공현을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나누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을 만백성이 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너와 나 사이에 주님 공현이 있습니다.

 

공현을 중심으로 삶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고받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사랑의 공현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늘의 사랑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빈자리가 필요합니다.

 

달려가 만날 그 자리에 언제나 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보여주어야 드러내어야 믿는 신앙이 아닌 뵙지 않고서도 믿는 신앙이길 기도드립니다. 공현은 오히려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서로의 길이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쁘게 떠나고 기쁘게 만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아직 끝난 것이 없는 여정을 봉헌합니다. 가슴을 여니 소중한 것들이 주님을 향합니다. 기쁨을 나누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 공현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기쁨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