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2,5-12)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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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복음
마르코 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10일 (화)
유상철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10일 (화)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10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 이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카파르나움으로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가르침의 세부 내용은 언급되지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를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사건은 예수님의 권위가 무엇인지 설명해 줍니다. 악령은 외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랍니다. 그리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모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의 신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기적도 가르침이라고 전합니다.
기적은 눈앞의 놀라운 사건을 넘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더욱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은 악령조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우리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도록 초대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변화를 인정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
어렸을 때의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서 제 모습이 계속 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갓난아기 때의 제 모습을 보고 지금의 저를 떠올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제 모습을 보고도 지금의 ‘저’임을 알기 힘들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은 어떨까요? 성격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긴 인간의 세포는 거의 7년 주기로 완전히 바뀐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포로는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7년 후의 ‘나’ 모두 완벽하게 다른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계속 변합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안다는 상대방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잘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부부간에도 대화가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지레짐작하고,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리를 둡니다.
변화하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할 때 드러나는 증세입니다. 상대방이 변했다면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를 진짜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권위로 가르쳤습니다. 율법에 쓰인 한 획 한 획만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율법에 구속된 것이 아닌, 당신의 말을 통해서도 더러운 영이 복종하는 권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권위는 바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원에 대해 말하는 더러운 영의 말을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 나가라.”(마르 1,25)라고 꾸짖으십니다. 악의 틈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갇혀 있는 사람의 아들을 잘 아시기에 그 감옥에서 곧바로 풀려날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는 사랑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변화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하느님께 모이도록 이끌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권위를 우리 역시 갖춰야 합니다. 진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게으름뱅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았는가! 노력의 결과로써 오는 어떤 성과의 기쁨 없이는 누구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블레이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표징 없는 가르침은 진리일 수 없다 .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율법 학자들과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권위란 세속적인 자격증을 의미하지 않고 성령의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성령으로 이루는 일을 ‘표징’이라 칭합니다. 표징이 따르는 가르침이라야 진리입니다. 표징이 가르침을 진리로 만드는 권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그러면 진리가 아닐까요? 십계명은 진리일까요, 아닐까요? 누구에게는 진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율법으로 머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이 말씀을 따르자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아직은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은총으로 표징이 따라야 그 같은 가르침이 진리가 됩니다. 율법은 아직 밀과 같아서 물과 불, 그리고 소금으로 빵이 되지 않으면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율법을 가르쳐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진리로 만드시는 그리스도를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표징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꼭 기적을 행해야만 표징이 아닙니다. 가장 큰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표징이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요한의 삶은 ‘인간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요한이 마귀 들렸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누구에게나 표징을 베푸는 가장 큰 스승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공통된 ‘어머니’란 스승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항상 세례자 요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가르침은 가슴에 새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 영국의 한 신문사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전수 조사해서 ‘위대한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특집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은 처칠은 신문사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학기인데도 선생님이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무료한지 여럿이 모여 모래 쌓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이 안타까운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 어디에 계신 줄 아느냐?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들 가거라. 그대들을 맞으러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사람이 자네들을 가르쳐줄 선생님이야.”
만약 저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의 표징이 없다면 저는 그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구약의 율법을 되풀이해서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 가르침에는 진리가 없을 것입니다. 권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가르침이 구원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고 이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진리로 스며듭니다.
나 자신이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되고 표징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가르침의 내용도 조금은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러니까 분명 구약의 율법과 같은 가르침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권위를 뒷받침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라고 놀라는 것입니다. 권위는 표징을 말하고 그 표징은 자기가 가르치는 것에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은 가르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내용이 달랐다기보다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성적을 올리려는 가르침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현재를 즐기라 하고 변화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어쨌건 아이들에게는 참된 선생님이었습니다. 표징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을 주었기에 하느님 눈에는 하느님 나라 율법 학자입니다.
예전에 EBS에서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하였습니다. 한 여 선생님은 아이들도 싫고 학교 오기도 싫습니다. 결국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선생님으로 사는 것조차 맛을 잃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보다 먼저 출근해서 오는 아이들을 안아줍니다.
이러한 표징을 통해 같은 가르침이지만 아이들이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전에는 선생님이 도깨비 같다고 하고 악마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면 가르침도 바뀝니다.
새로워집니다. 사람을 바꾸는 가르침이 됩니다.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무장하여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며 가르침에 합당한 표징도 일으키는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진정한 권위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요즘은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걱정들입니다. 사법부의 권위, 통치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요즘 권위가 떨어진 것을 얘기함은 그런 권위를 말함이 아닐 것입니다.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성직자들의 권위도 전과 비교할 때 별로 없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보다 스승과 성직자들의 권위가 사라짐을 걱정함은 이들이 바로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권위가 있어야 이 길로 가던 사람이 저 길로 길을 바꾸고, 방황하던 사람이 마음을 잡고 올바른 길을 가며,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다시 기운을 차려 일어설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멘토니 멘티니 하는 서양말이 요즘 유행입니다. 멘토(Mentor)는 단순한 지식전달자와 기술 전달자가 아닙니다.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고 중요한 순간 옳은 판단을 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도나도 멘토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며 비판적으로 얘기하자면 스승을 깔아뭉개면서, 멘토가 없으니 멘토가 있어야 한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우습기도 하지만 나이 든 사람으로서 그리고 수도자요 사제로서 반성적으로 얘기한다면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성직자로서 우리 기성세대가 권위를 상실하였음을 마음 아파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고, 스승은 스승답고. 성직자는 성직자다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직능적 권위,
권력적 권위,
직위적 권위,
주둥아리 권위는 권위가 아닙니다.
그다음으로 지니게 되는 존재적 권위.
실천하는 바를 가르치는 실천적 권위.
사랑으로 다가서고 이끄는 동반적 권위.
행복으로 행복에로 이끄는 행복한 권위.
이런 것들이 진정한 권위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뛰어난 권위는 영적인 권위가 아닐까요? 그런데 그게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악령들을 퇴치하는 그런 권위인가요?
그런 영적인 권위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영적인 권위는 없더라도 육의 영을 분별하고 부끄럽게 하는 영적인 권위, 그래서 지상이 아니라 천상을 갈망케 하는 영적인 권위만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어떻게 이끌어 가실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삶을 주시고 삶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삶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자신보다 우리자신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삶에 감사하는 것이 주님께 감사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계속하여 이어지는 것이 우리들 삶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어린아이같이 맡겨드립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기시에 삶은 놀랍기만 합니다. 극단을 내려놓으니 삶은 연중시기같이 은총이 됩니다.
외롭고 힘든 시간도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임을 압니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위대한 오늘임을 압니다. 알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주님께 맡깁니다.
나의 뜻을 굽히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신비를 믿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새롭고 놀랍고 신기한 신앙의 새 역사가 뜨겁게 펼쳐집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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