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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12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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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3,7-14)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십시오.

  • 오늘 복음
    (마르코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12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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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복음
마르코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12일 (목)
유상철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12일 (목)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12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원의를 강조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믿었고 그분을 만납니다. 복음은 그의 행동을 ‘오다’, ‘청하다’, ‘무릎을 꿇다’로 표현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이미 그의 행동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유 이야기이지만 나병 환자의 모습은 기도하는 이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수난 전에 겟세마니에서 홀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본보기입니다. 나병 환자도 이를 충실하게 따릅니다.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기도는 모두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먼저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무작정 청하기보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들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괜찮고 너도 괜찮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토마스 해리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인간관계의 유형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I’m Ok, You’re not Ok.”(나는 괜찮지만 너는 하찮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 성향자의 마음 자세를 뜻합니다. 
 
둘째는 “I’m not Ok, You’re Ok.”(나는 하찮은데, 너는 괜찮다) 
 
열등감을 지닌 사람의 태도를 말합니다. 
 
셋째는 “I’m not Ok, You’re not Ok.”(나나 너나 모두 하찮은 존재이다) 
 
비관적인 또는 허무적인 태도를 뜻합니다. 
 
이 세 가지 태도 모두 건강할 수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I’m Ok, You’re Ok.”(나는 괜찮고 너도 괜찮다) 
 
건강한 자기 존중감은 자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여길 때 생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괜찮기를 바라면, 자기 존중감이 높아질 것 같지만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괜찮다”라고 서로에게 말해 줄 때, 모두 건강하게 주님 뜻에 맞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보통은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치료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 앞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가장 불쌍한 상태, 자존감이 거의 없는 “I’m not Ok.”의 상태인 나병 환자를 “You’re Ok.”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당신 사랑으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I’m Ok, You’re Ok.”로 만들어 주시려고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갖고, 나의 이웃 역시 자기 존중감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제1독서의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히브 3,13)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는 좋고 나쁜 것이란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감사의 은총을 잃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한 나병환자가 주님의 은혜로 깨끗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 이득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받은 은총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덕분에 예수님은 박해받는 신세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예수님은 외딴곳에 머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유된 나병환자는 다시 예수님을 만나러 올 수 있을까요? 죄송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날 용기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결국엔 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주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감사는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국엔 예수님께 피해를 줬습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중요한 것은 너무나 잘 압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싶고 그러면 내가 그분이 원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매 미사 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하지만 감사가 잘 나오지 않고 여전히 청하기만 합니다. 문제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감사가 지속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행동에 있습니다. 

한맥 투자 증권은 1991년 진로그룹 계열사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12월 12일, 한 직원이 작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옵션가격의 변수인 이자율을 ‘잔여일/365’로 입력해야 했는데 ‘잔여일/0’이라고 잘못 기입한 것입니다. 이에 모든 상황에 이익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프로그램이 막대한 양의 거래를 체결해버렸습니다. 

물론 직원은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전원코드를 뽑았습니다. 하지만 143초 동안 3만 7천 900여 건의 거래가 이뤄졌고 이로 인한 손실이 462억 원이었습니다. 다음날 정규직 45명, 계약직원 100명 등 임직원 총 157명 중 12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한 한맥 투자 증권은 파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회사에 감사하고 봉사하고 싶어도 회사에서 금지된 일을 하게 된다면 그 감사와 봉사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감사하려 해도 잘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의 시작은 교만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불순종이 시작되고 그것이 죄입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던 은혜를 일순간에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내가 교만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자주 살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치유된 나병환자는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주님께 도움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감사만으로는 교만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감사헌금을 하면서 더 감사한 일이 많이 생기게 해 달라는 청을 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내 생각이 옳다며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느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왕의 권위를 벗어나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까지 벌인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내치십니다. 교만은 항상 내가 더 옳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감사하면서도 불순종하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파멸로 이끕니다. 불순종하는 대상에게 감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더 높고 더 많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겸손해지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작은 계명부터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선악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안 해도 된다고 믿을까요? 또 안식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전쟁 때도 총을 들지 않아 몰살당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겸손해지는 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겸손해지려 하고 감사하려 한다고 될까요? 안 됩니다. 먼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으면 겸손이 없고 그러면 은총이 끊겨 멸망만 남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다는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파멸에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 18,12)

 불순종은 은총이 끊기는 가장 완전한 길입니다. 먼저 십일조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에 순종합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거나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계명도 지키려고 합시다. 먼저 이런 것들을 지켜야 은총에 감사가 지속될 수 있고 그 감사가 나를 하느님처럼 변화하게 합니다. 불순종은 이미 교만을 선택한 것이기에 겸손에서 나오는 감사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을 넣지 않고 쌀만으로는 밥을 지일 수 없는 것처럼, 순종 없는 감사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일조 계명에 먼저 순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감사의 지속 조건은 순종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마음은?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히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저도 마음을 주제로, 완고한 마음과 가엾은 마음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마음에 대한 많은 이론이 있고 특히 근자에 와서 심리학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가히 심리학 전성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심리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학자들 이론에 크게 관심두지 않기에 마음에 대해서도 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는데 그 거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란 이성과 감성과 의지의 종합적인 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말이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유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고, 이것에 영향을 주는 것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육체도 영향을 주고, 욕구도 영향을 주고, 정신도 영향을 주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뭔가 결핍을 느낄 때 욕구가 생기는데 이 욕구에 이성이 반대를 하더라도 감성이 강하게 작용하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고, 욕망이 생겼다 하더라도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욕망으로 그치지만 의지가 동의하면 욕심으로 발전하지요. 

그런데 육체나 본능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이 있는데 어제 이미 얘기한 바 있는 영성 생활이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영을 추구하는 것이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어제 말씀드린 바입니다.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신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영/정신에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육체와 본능을 따르는 썩어빠진 정신이란 것이 육의 영이라면 고귀한 정신은 육체와 본능을 따르거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치 않고 초월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거라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기도와 헌신의 영/정신은 성령과 교감하는 정신이라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마음이 민감하게 되어 오늘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시편 말씀처럼 오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흘려듣거나 목석과 같이 듣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에 늘 깨어있을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라는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민감하지 않고 완고하다는 것은 아예 아무 말을 듣지 않는 것도 포함하지만 옛날얘기만 간직하고 오늘 듣지 않는 것도 포함하지만 옛날얘기만 간직하고 오늘 듣지 않는 것도 포함키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 말만 기억하고 오늘 들리는 말에 무디기 쉬운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정확히 똑같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하느님 말씀에만 민감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처지와 필요 특히 아픔과 고통들에 대해서 민감해야 하는데 이웃의 아픔과 고통들에 민감함이 바로 가엾은 마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심코 지나친다는 우리말이 있는데 이 무심하다는 말을 뜯어보면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사람 무시무시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이 무심한 사람이 꽤 있습니다. 모든 일에 무심한 사람도 있고 귀찮은 일에만 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곧 아프리카 난민 돕기 광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것처럼 또는 전기의 퓨즈를 끊듯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는 사람인데 나는 어떤 사람, 마음이 없는 사람인지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치유를 통해 삶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치유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아픈 사연을 들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열리는 깨끗한 치유의 참기쁨입니다. 깨끗이 될수록 깊어지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어루만지시고 쓰다듬으시는 끝나지 않은 창조의 새날들입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일어나는 주님의 치유입니다. 죄가 아니라 욕망이 아니라 깨끗한 사랑을 확인하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모든 사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연민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주님의 간절한 사랑을 우리의 아픔을 통해 다시 만납니다. 간절한 기도 간절한 사랑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안에는 깨끗한 치유와 맑은 회복이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게합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저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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