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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1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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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를 구원하러 오소서.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2022년 12월 11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35,1-6ㄴ.10)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제2독서
    (야고보서 5,7-10)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1,2-11)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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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오니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복음
마태 11장 2-11절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11일 (일)
김영수 헨리코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11일 (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11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됩니다. 마태오 복음 11-12장은 10장의 파견 설교에 이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을 의심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엿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물으시면서 그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가십니다(루카 7,18ㄴ-23; 7,24-30도 참조).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여기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은 헤로데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는 낙타털 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른 채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대조됩니다(마태 3,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질문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이며 동시에 예언자보다 더 큰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로서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에서 예고된 하느님의 약속을 완성한 인물입니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에서 사용된 일인칭(‘내’, ‘나’)은 마태오 복음 11장 10절,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에서 이인칭(‘네’, ‘너’)으로 수정되었는데, 복음서 저자는 이러한 편집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늘은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대가 한층 커져 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하나로 합쳐지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강론 지침』, 90항 참조).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마태 3,2.7-12 참조)를 귀담아들으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례자 요한은 기쁜 소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쁨에 관하여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첫째 독서의 첫 마디가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이고 이어지는 말들도 온통 ‘기쁨’, ‘환호’, ‘환성’ 같은 매우 희망적인 말들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오늘 우리도 기쁨에 대해 생각게 되고, 우리의 기쁨은 어떤 기쁨이고 어떤 기쁨이어야 하는지도 생각게 됩니다. 

기쁨은 첫째로 소유적 만족감입니다. 갖고 싶었던 컴퓨터를 갖게 되었을 때 기쁘지요. 

둘째로 성취적 만족감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추진 중인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 기쁩니다. 

셋째로 인격적 만족감입니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거나 기다리던 손자를 얻었을 때 기쁩니다. 

기쁨이 이렇게 몇 가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꿈, 희망,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갖거나 이루거나 만나기까지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 중의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기쁨이 더 크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이 생겼는데 집을 갖는 것이 오랜 꿈이 아니거나 꿈이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갖게 되면 그 기쁨이 오랫동안 고생고생한 끝에 산 것에 비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쁨을 추구합니까? 

돈을 얻는 기쁨과 사람을 얻는 기쁨이 있는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구원을 얻는 기쁨과 치유를 얻는 기쁨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쁨을? 병이 낫는 기쁨과 현존 체험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기쁨을? 

다른 말로 하면 소유의 기쁨과 성취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성취의 기쁨과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인간 사랑의 기쁨과 하느님 사랑의 기쁨 가운데 어떤 기쁨을? 

대리 만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만족을 대신하는 만족을 일컫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다가 비만이 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기쁨에도 대리 기쁨이 있습니다. 상위의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위의 기쁨에 주저앉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저앉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성취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천상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 기쁨에 주저앉습니다. 구원의 기쁨 대신에 성취나 치유의 기쁨으로 만족합니다. 

구원자가 오시길 기다리지 않고 손자가 오길 기다립니다. 스마트 폰 화면에 성화가 있지 않고 손자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는 기쁨은 인격적이면서도 성취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기쁨이요, 구원자를 만남으로써 원하던 구원이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사야의 이 예언이 주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됨을 얘기합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보내어 주님이 그 메시아인지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말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께 희망과 사랑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도 바흐의 칸타타(가톨릭 성가 180번), ‘인간의 희망이요 기쁨이신 예수’ 이 성가를 들어보시길 추천하며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의 진짜 본성은 낳고 키울 때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당연히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면서까지 제자들을 당신께 보낸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사람 중에서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는 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개 중에 가장 훌륭한 개는 인간 중에 가장 작은 인간보다 귀한 존재일까요? 당연히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 중 가장 작은 이도 개의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며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곧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파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꿀벌이 될까요? 만약 파리가 꿀벌이 되었다면 그 중간에 꿀벌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투머로우랜드’(2015)란 공상과학 판타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아테나란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주인공 남자는 그 여자아이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아주 먼 미래입니다. 아테나는 시간여행을 시켜줄 수 있는 여자아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미래로 가는 것은 본성을 바꾸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서 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 태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본성으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의 본성을 가진 이를 태어나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영화 ‘킹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노예 소년이 대장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노력한 결과 그냥 싸움 잘하는 노예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 준 이가 왕이 되자 그의 지위는 그대로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낳는 이의 본성이 왕이면 자신도 그와 대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도 제자들을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게 만들기에 그 본성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한 거지에게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태석 신부는 돌아가셔서도 아이들을 의사로 키워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한 거지를 그리스도로 볼 수 없고 믿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면 의사로 키워낼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본성을 바꿔주는 일입니다. 만약 나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제직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사제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당신과 같은 비천한 종도 하느님을 낳으셨다면 우리도 모두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내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들어 높일 수 있는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뱀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본성에 머물러 있게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뱀과 그 말을 따르는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인 이는 모두 신이 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마치 난자처럼 정자를 받아들이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믿음을 전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되고 내세에 어디에 살지, 어떤 위치에서 살지기 결정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책을 읽다가 사람 몸에 0.2mg(70kg 사람 기준)의 금이 들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금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소, 산소, 수소, 구리, 아연 등이 몸 안에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 몸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리나 아연은 느끼십니까? 단 한 명도 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런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에 어떤 긍정적 요소가 없다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앞서 금, 구리, 아연 등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부정적 요소나 긍정적 요소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냥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잘못된 마음에서는 나오는 것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요소도 차고 넘칩니다. 기쁨, 희망, 사랑, 행복 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적은 긍정적 요소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으며, 세례받으실 때의 사건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도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고쳐 준다는 이야기, 안식일 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세례자 요한의 감옥 생활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지금처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햇빛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감옥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까지 더해지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의심을 지우고 굳게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 F.실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오실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기다리는 대림의 기쁜 설레임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응답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보고 듣는 사랑을 전하고 나눌 뿐입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의심을 품을 수 없는 행복한 소식입니다. 

행복한 만남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광야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오실 분의 길을 닦는 사람은 고운 옷을 걸친 왕궁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느님께서 수련을 시킨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하느님의 겸손을 바라보고 만날 수 없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 기다림의 본질을 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본질은 마음을 닦는 것이며 마음을 닦는 것은 자선(慈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기다림은 충만하여지고 기다림으로 사랑은 깊어갑니다. 사랑으로 오실 분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자선 주일입니다. 무엇을 보며 살 것인가 보다 무엇을 나누며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복음의 삶입니다. 사람의 희망은 사람이며 사람의 기쁨이 소중한 사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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