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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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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2022년 12월 9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1,16-19)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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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

 

 

복음
마태 11장 16-19절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9일 (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9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9일 (금)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진심으로 회개할 때,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10장의 파견 설교 이후, 11-12장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함께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다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평가(11,2-6 참조)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 평가(11,7-15 참조)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비유적 표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견주십니다. 여기서 “세대”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적대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장 17절의 비유는 두 가지 상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는 혼인 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 예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금욕주의적 삶은 그를 장례 놀이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회개하기보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비금욕주의적 삶은 혼인 놀이로 확인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적대자들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날 선 시선으로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반대자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느 장단에

 

오늘 주님께서는 짧은 비유를 드시는데 당신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당신 세대가 아이들처럼 미성숙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미성숙하냐 하면 자기가 반주해주는 대로 춤추지 않고 장송곡을 연주해도 같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완전히 자기중심의 미성숙이지요.,그런데 이런 미성숙도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아무 장단에 춤추는 미성숙입니다. 

이런 미성숙도 또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아예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이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완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성숙이 있습니다. 

미성숙 1:  
내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의 미성숙. 

미성숙 2:  
아무 장단에나 놀아나는 줏대 없는 미성숙. 

미성숙 3: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경직되고 자폐적인 미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란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남의 장단에 내가 놀아나지도 않으며, 아무 장단에나 춤추지 않지만, 어느 장단에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사랑의 장단에는 춤을 추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장단에는 춤을 춥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장단에는 놀아나지 않고, 사랑의 장단에는 어울려서 춤추고 신명 나게 춤을 춥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거나 흉보는 말은 듣지 않고, 하소연과 도움이나 동감을 얻으려는 말은 귀담아들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은 굶는다고 비난하고 주님은 먹는다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어떤 말도 거부하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것이고,,그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이 대림 시기에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장)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장)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꼭 먼저 지녀야 하는 이것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세대를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까요?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원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사람들은 지혜가 없기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하고 아드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가고 그분의 말씀에 흔들리고 춤을 추고 곡도 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킹덤’(2019)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배경입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노예 ‘신’은 진나라의 천하대장군을 직접 마주하고는 꿈을 꾸게 됩니다. 바로 자신도 대장군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노예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신은 꿈을 꾸게 됩니다.

저도 죄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지만 그 꿈은 커다란 자기와의 싸움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삶입니다. 

죄와 싸우려면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각성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흰 도화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으려면 우리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이 맑아집니다. 배부를 때는 정신이 혼미합니다.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배고플 때는 정신이 맑습니다. 그러면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밥 생각밖에 안 나기에 정신이 맑은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죄와 싸웠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잠을 잘 때도 딱딱한 판자 위에서 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킹덤’에서도 그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위해 쉼 없이 자기와의 싸움에 돌입합니다. 다들 헛된 꿈을 꾸며 고생하는 진을 어리석게 봅니다. 유다인들이 요한의 삶을 보며 어리석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왜 단식하고 금주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을 꾸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하는 고생입니다. 지혜를 지닌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킹덤’에서 진도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노비의 신분은 벗을 수 없음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줄 당시에 쫓기고 있었던 왕을 만납니다. 그는 그 왕이 왕권을 회복하게 도와줍니다. 결국 신분을 올려줄 대상을 만나야 대장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 왕을 위해 싸우고 왕이 왕권을 회복하자 그는 대장군의 지위를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꿈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왕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까지 알아야 지혜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그렇게 죄에서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으로 그 옳음이 증명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스트레스 주는 것은 그저 흰 도화지를 준비하는 것뿐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결국 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욕망이 사라져야 죄를 이길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니 그런 욕망이 솟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즐기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가 이뤄놓는 일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도 만나게 해 주지만 그리스도도 만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죄를 이기려는 자는 육체를 절제하다가 결국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혜란 바로 죄를 이기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려 하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곧 죄를 이겨야만 행복할 수 있다, 혹은 내가 힘든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들과 어울리는 이는 지혜로워지고 우둔한 자들과 사귀는 자는 해를 입는다.”(잠언 13,20)

우리는 당연히 죄와 싸워야 함을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죄 안 짓고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자들이 단식하고 절제할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고 또 신자들이 먹고 마실 때는 어떻게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흥청대느냐고 말합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이겨야 행복할 수 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 망친다.

 

자기 욕망을 줄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을 하면서 살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완전히 없앤다고 잘 사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어렸을 때, 저는 전자오락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용돈이 생기면 전자오락실로 향했고, 돈이 없을 때는 오락실에서 남이 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오락실 간 것이 들통났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오락실을 다니는 거야?” 
 
지금 커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오락이나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렸을 때 전자오락실 간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순간의 만족이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모두 버리고 하기 싫은 것만 하면, 재미없는 인생으로 더 망치게 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욕망 안에서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분명 기쁨과 함께 더 나은 나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원하고,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한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는데 춤추지 않으면 장단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른 한패는 곡을 하며 장례 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놀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례 놀이는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외침이고, 잔치 놀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즉,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하는데, 자기 일에만 집중해서 해야 할 모습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 전체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생활한다면, 욕망으로 보이는 나의 즐거움 안에서도 큰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진 것이 적을수록 즐기는 일들을 할 시간이 생긴다.

- 비 존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음의 지혜는 마음의 공감입니다. 마음의 지혜를 회복하는 것이 대림의 참된 여정입니다. 마음을 잃어버린 세대는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마저 알아보지 못하며 부정합니다. 가슴을 치고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 용서와 해방의 지혜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삶의 묶인 것을 풀어주시는 살아계신 지혜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옳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불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절제된 모습으로 또 예수님같이 어울리며 함께하시는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삶다운 삶의 길을 예수님의 삶에서 배워야 합니다. 마음으로 돌아가 마음을 나누는 마음의 성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묻는 대림의 시간입니다. 마음은 지혜가 필요하고 지혜는 함께하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가장 좋으신 예수님과 함께 삶의 공감 삶의 기쁨을 나누는 가장 좋은 오늘 되십시오. 

사랑의 사람이 지혜이고 사랑의 사람이 이루는 일들이 이 세대를 바꾸는 참된 복음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갇혀있는 복음을 꺼내어 모든 곳에서 함께하는 복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대림의 지혜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공감의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마음을 먹고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옳으신 지혜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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