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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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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2022년 12월 7일 (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40,25-31)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1,28-30)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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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복된 암브로시오 주교를 가톨릭 신앙의 스승으로 세우시어 사도의 용기를 보여 주게 하셨으니 교회 안에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뽑으시어 용감하고 지혜롭게 교회를 이끌어 가게 하소서.

 

 

복음
마태 11장 28-30절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7일 (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7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7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마태오 복음 11-12장은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각 장의 마무리(11,25-30; 12,46-50 참조)는 긍정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13장 1-8절에서 소개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11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앞선 25-27절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11장 25-30절은 같은 문학적 형식을 가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같은 주제(하늘 나라의 역설적 가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되는 특권)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잠재적 제자들, 곧 아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사람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규제하려는 율법 학자들의 요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3,4 참조).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들을 초대하시며 그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식을 누리려면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5,5; 21,5 참조). 율법 학자들이 토라(율법)의 멍에로 사람들을 얽매고 구속하였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그 관계는 배움으로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그 초대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선택과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힘들 때 내가 찾는 곳은 어디?

 

열심한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볼 때 많이 하는 고백이 다른 기도는 잘하는 편인데 저녁 기도는 피곤해서 자주 빼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권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피곤해서 빼먹을 바에는 누워서라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막말로 기도 안 하는 것보다 누워서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사실 기도라는 것이 정해진 기도문을 꼭 무릎 꿇고 해야만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물거나 하느님 안에 머물면 되는 것이고, 더욱이 피곤할 때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 기도이고 피곤을 푸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묾이라는 뜻이지요. 진정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여 나아가고 주님 안에 머물며 사랑에 흠뻑 젖는 겁니다. 

고백성사 얘기를 또 하면 너무 힘들어서 점쟁이한테 갔다는 얘기를 적잖이 듣는데 그때 마음이 참 아프고, 특히 저와 모르는 사이가 아닌 분들이 점쟁이한테 갔다는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픈 것을 넘어서 제가 참 죄송스럽기까지 합니다. 

힘들면 하느님께 가야 하는데 점쟁이한테 간 것이 마음 아프고, 하느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하느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아서 점쟁이한테 가는 거라면 제게라도 오면 될 텐데 저라는 존재가 오고 싶지 않거나 곁을 주지 않거나 바쁜 척하거나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오시지들 않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저는 꼭 말씀드립니다. 점쟁이한테 가지 말고 저에게 오시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직접 오시기 어려우면 전화라도 하시라고. 

물론 정작 가야 할 곳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고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상기시키며 하느님께 달려가라고 말씀드리지요. 

사실 우리가 진정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지치고 힘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힘들 때 엄마도 생각나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각나지만 "오너라"는 주님의 초대가 제일 먼저 생각나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 생각에 주님께 가서 뭘 꼭 해야 하는 것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뭘 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기도하는 것도 뭘 청원하든지 찬미 찬양하고 감사드리기도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 사랑에 흠뻑 젖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지친 우리가 거기서 힘을 얻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힘들 때 주님께 가서 해야 할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배워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가서 힘을 얻을뿐 아니라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주님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녕 주님의 멍에로 짐을 지면 가볍습니까? 멍에란 것이 본시 불편한 건데 주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이길래 편합니까?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한 마음이기에 편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나에게 이런 짐이?'라고 거역하는 마음이 우리의 짐을 더 무겁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반대의 이치로 우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우리의 십자가가 덜 무거울 겁니다. 

물론 오늘은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사랑이라는 멍에로 지면 덜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가볍고 더 나아가 뿌듯하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일 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안식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희랍어로 안식은 ‘아나파우시스’, 곧 ‘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 마음은 쉬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압제에서 일한 것처럼 계속 일하고 지쳐갑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게 피곤한 것이 외부의 요인이지, 나의 마음 때문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학대받고 비참하게 버려진 채 발견된 강아지는 며칠 동안 벽에 머리를 박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앙상한 몸, 피부를 장악한 옴, 온몸에 묻은 오물까지 심한 학대를 견뎌왔음이 확실시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고 사람을 등졌습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고 그냥 벽만 바라보았습니다. 녀석은 지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심지어 우는 것도 할 수 없는 끝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언어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녀석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열쇠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엔젤이라는 이 개와 비슷한 처지의 유기견을 발견하여 데려온 것입니다. 이 녀석도 돌봄을 받지 못해 굉장히 야윈 상태였지만 비교적 씩씩하고 그래도 인간을 믿고 따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엔젤이 이 녀석을 보자 구석에서 나와 녀석을 반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녀석과 함께 뛰놀았습니다. 구조단체는 이 녀석이 엔젤과 피부색,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둘의 사이를 보곤 엔젤의 형제견이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클리프는 엔젤에게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란 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엔젤은 조금씩 클리프에게서 이 마음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6개월쯤 지나서 엔젤은 이제 완전히 자기 껍데기에서 벗어나 클리프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맛있는 음식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을 되찾았고 곱디고운 빛깔의 털을 맘껏 뽐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마음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파라오의 종살이였습니다. 힘들고 지치면서도 이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바꿔줄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지옥도 행복이라 여길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란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제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그분은 좋으신 분이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 마음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제가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다’가 그분의 ‘마음’임을 압니다. 그분의 마음을 받으면 이제 무거운 짐이 사라집니다. 휴식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었습니다. 에사우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멍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멍에가 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 믿으면 그분의 마음이 나에게 장착됩니다. 엔젤이 자신도 클리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클리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하면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고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가 됩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무꾼이 그러했습니다. 나무꾼은 따듯한 심장을 가지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의 마음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겨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러면 내 안에 그분의 심장이 생성됩니다. 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참 차갑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따듯한 심장을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마치 엔젤처럼 예수님과 사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이 하.사.시.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장착할 때 나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렇게 덜 피곤하게 되고 비로소 휴식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제 사제서품 구가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나의 마음이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임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 심장을 주시고 우리는 뱀과 파라오,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참된 휴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 일을 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불확실한 현실에서 용기를 내어 다시 희망을 간직해야 할 때.

 

고등학생 때,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얀 피부, 언제나 밝게 웃는 모습, 그리고 말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저에게, 또 남 앞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저에게, 무엇보다 신부가 되겠다고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고 있는 저에게, 그 여학생에게 다가갈 용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문득 그때 그 여학생에게 고백하고 정말로 사귀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요? 신부가 아닌 신랑의 삶에 더 만족스러워하고 있을까요? 
 
확실한 사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야 자기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즐기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현실을 고통과 시련으로 받아들여서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불확실한 현실을 힘차게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바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스스로 멍에를 메셨습니다. 멍에는 소나 나귀 등의 목에 얹어 쟁기나 수레를 끄는 목제 도구입니다. 또 전쟁 포로나 노예의 목에 씌우는 굴종의 도구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스스로 선택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멍에를 편하게 해 주셨고, 짐을 가볍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 불확실한 현실에서 용기를 내어 다시 희망을 간직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주님께 가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고생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먼저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주님의 멍에도 주님의 십자가도 모두 우리를 위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은총을 배우고 감사를 배웁니다. 감사보다 더 좋은 휴식은 없습니다. 멍에 없는 안식으로는 주님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주님께서 지어주신 짐은 참으로 가볍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아닌 주님께 다시 배우는 삶의 축복입니다. 내려놓을 수 있는 주님이 계셔 참으로 편안합니다. 

내려놓을 수 없는 주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때론 멍에가 되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도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완벽한 신앙 완벽한 사랑은 숨이 막힙니다.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때론 멍에처럼 다가오는 수도공동체의 삶도 주님께서 중심이 되면 편하고 가벼워집니다. 공동체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내려놓는 법을 휴식하는 법을 다시 멍에를 메고 따르는 법을 배웁니다. 휴식에도 길이 있고 사랑에도 길이 있고 신앙에도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통해 진실로 배웁니다. 불필요한 멍에를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사랑이라는 신앙의 길은 주님께 힘을 얻는 은총의 길입니다. 

은총을 언제나 가득 채워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오늘입니다. 버겁고 무거운 멍에도 짐도 우리를 알기에 우리를 위한 참된 사랑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십자가도 멍에도 짐도 주님을 향해 머리를 숙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시 배우는 대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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