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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3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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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양을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2022년 12월 3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30장 19-21절, 23-26절)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리라.

  • 오늘 복음
    (마태 9장 35-38절 / 10장 1절, 6-8절)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3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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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의 설교로 많은 백성들을 부르셨으니 모든 신자들이 그 선교 열정으로 불타올라 거룩한 교회가 세상 어디서나 새로운 자녀들을 많이 얻어 기뻐하게 하소서.

 

 

복음
마태 9장 35-38절
10장 1절 6-8절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강론

 

 

2022년 12월 3일 (토)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2월 3일 (토)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2022년 12월 3일 (토)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하기.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의 선발과 파견,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을 요약하면서 스승이자 치유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권한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아픈 이를 고쳐 주며 죽은 이를 다시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고 파견되어 ‘사도’로서 수행해야 하는 복음 선포 활동은 마태오 복음 9장 35절에 묘사된 예수님의 활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 곧 예수님에게서 권한을 받아 그분을 대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가 수행하는 권한은 ‘파견한 이’와 ‘파견된 이’의 정체성을 밝히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이의 존재 이유와 역할은 파견한 이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파견은 복음 선포로 하늘 나라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고 하느님의 신적 현존을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도로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답은 분명하고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사도적 활동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순(耳順)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기가 꺾인 사람들이고, 주님은 그런 우리를 가엾어하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며 그래서 대림절에 이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과 대림절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묵상이랄까 성찰을 하였습니다. 

기가 꺾인 우리의 기를 세워주시기 주님께서 오셨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기가 꺾인 사람인가? 기고만장한 사람인가? 어떤 사람인 것이 내게 좋을까? 기가 꺾인 사람인가? 기고만장한 사람인가? 

기가 꺾여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과 기가 하늘로 솟은 것이 만장이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좋을까요? 

인간적으로만 보면 기가 꺾인 사람은 가여운 사람이고, 기고만장한 사람은 좋게만 볼 수 없더라도 가여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본다면 기고만장한 사람은 분명 가엾고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대림절이어도 주님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만 빼놓고 오실 리 없으시지만 그에게 오셔도 그는 필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자기 기가 센 사람의 특징이지요. 약자나 병자들이 하느님에게든 인간에게든 남의 기를 받지 기가 센 사람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기를 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면에서는 기가 센 것보다 기가 꺾인 것이 차라리 낫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기가 죽어 있을 뿐 주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지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성찰해봅니다. 옛날의 저는 두말할 여지 없이 기고만장했습니다. 교만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때와 비교하여 기가 많이 죽은 지금이 오히려 전보다 나은 상태라고, 공자가 나이 60이 되면 이순이어야 한다고 한 대로 이순(耳順)의 상태라고 곧 듣기를 순히 듣는 상태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침 오늘 독서 이사야서도 ‘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대림절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너희의 눈이 스승을 뵙게 되리라.” 

“뒤에서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그러니 우리의 이순이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도 이순이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데에 이순이어야 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순히 들은 우리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았느니 주라는’ 오늘 마지막 주님 말씀대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고 기를 세워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님은 왜 젊은 사람만 좋아하는 거예요?

 

기분 나쁠 때는 혼자서 자기감정을 삭힐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더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폭발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 정신건강에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공동체에는 최악이 됩니다. 기분 나쁘고 또 맘에 안 든다고, 그래서 바로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는 절대로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구성원 전체가 불행해지는 것은 금방입니다. 
 
감정을 폭발하면 후련함을 잠시 가질 수는 있겠지만, 더 큰 불편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이라도 걸러야 한다고 많은 심리학자가 조언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유지되고 본인 역시 편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70대의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80대의 할머니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다가가 이렇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왜 젊은 사람만 좋아하는 거예요?” 
 
그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70대나 80대나 똑같이 본당의 어르신이라고 생각했는데, 70대 할머니들과 80대 할머니들 사이에도 벽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긴 조그마한 꼬마들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감정을 폭발하면 이렇게 벽이 세워집니다. 함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벽이 치워집니다.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늘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굳이 부족함이 많은 제자를 뽑아서 이러한 특수한 권한까지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서 힘들어하는 모든 인간을 구원의 길, 참 기쁨의 길인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더 많은 목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하길 간절하게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자기감정을 폭발해서 벽을 쌓는 그래서 자기만족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길로 가면 안 됩니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함께 사는 세상에서 적합한 나의 모습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인지를 말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주님은 증오를 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지만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들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 파울로 코엘료, ‘다섯 번째 산’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열정같은 사랑입니다. 열정이 있기에 복음의 뜻은 언제나 낡지 않고 새롭기만 합니다. 새로워지는 사랑은 가르치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은 수확의 참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을 수확할 일꾼들이 적습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러운 영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줍니다. 길 잃은 양들의 목자가 됩니다. 강렬한 실천의지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하늘 나라가 정녕 가까이 왔음을 제자들의 기쁜 삶으로 선포하게 하십니다. 

가까이 온 기쁜 소식은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 마귀들을 쫓아냅니다. 이러한 권한은 주님께 거저 받은 것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댓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는 행복입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새 마음과 새 뜻입니다. 끝까지 실천하는 이들이 누리게 되는 수확의 기쁨입니다. 기가 꺾인 양들에게 필요한 것은 목자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대림시기는 더더욱 참된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의 참된 방향은 참된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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