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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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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2022년 12월 2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29,17-24)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오늘 복음
    (마태오 9,27-31)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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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저희를 죄의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하여 주소서.

 

 

복음
마태 9장 27-31절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희석 임마누엘 신부 강론

 

 

2022년 12월 2일 (금)
박희석 임마누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12월 2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2월 2일 (금)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너희는 믿느냐?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8-9장에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메시아’로 그리고 있습니다. 앞선 5-7장에서는 긴 설교문을 구성하여 ‘가르치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강조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관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선발하여 파견하시기에 앞서 당신의 메시아적 신원을 밝히고 계십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그의 딸을 살려 주신(마태 9,18-26 참조)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눈먼 사람 둘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주십사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의 첫째 구절에서 언급된 이래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는 호칭으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기대처럼 원수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전사나 강력한 정치 지도자의 모습으로 당신의 메시아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정체성은 자기희생(8,17 참조)을 동반한 온유와 겸손(11,29; 21,1-11 참조)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소개하는 예수님께서는 다윗 가문 출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눈먼 두 사람은 연민과 치유로 메시아적 권위를 행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그 믿음 때문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은 치유를 위한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믿음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지금은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누구에게나 하시는 질문, 믿느냐?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달라는 두 눈먼 이에게 믿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하시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생각해봅니다.,믿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믿지 않고는 한시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믿는 것과 잘 못 믿는 것이 있거나 옳게 믿는 사람과 그릇되게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도 비슷한 얘기를 했듯이 자기나 인간을 믿는 사람이 있거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우상을 믿거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힘을 믿거나 하느님의 힘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돈이면 다 된다고 믿거나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오늘 눈먼 사람들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치유를 더 믿거나 인간의 치유를 더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도 눈먼 사람들은 더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을에 오셨을 때,주님을 찾아온 이들은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 둘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셨는데도 그리고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았는데도,주님을 찾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왜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들도 아마 눈 뜨고픈 갈망이 있었을 것이고 그만큼 시도도 있었을 겁니다. 용한 의사가 있다는 말을 믿고 찾아간 적도 몇 번 이상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 다 허사가 되고 난 뒤 믿지 않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들도 여전히 믿기는 믿는데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것일 겁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온 이들도 마찬가지로 의사를 믿었던 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똑같이 자기들의 믿음이 허사가 된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가망성이 있다고, 주님께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망성과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가망성이 없다고 믿는 순간, 아무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믿다가 또 인간을 믿다가 가능성을 믿지 않게 곧 불가능성을 믿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신과 인간을 믿다가 허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른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은 하느님께 눈을 돌려 눈을 뜨게 된 이들인데 우리도 하느님께 눈을 돌려 눈을 뜨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흐의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듣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능력을 발휘하는 법 : 주님께서 우리를 응원하시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경위는 이러합니다. 처음에 그가 원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그다음엔 자신이 청하는 대상, 곧 그리스도께서 그러할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눈먼 이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다음 눈을 뜰 능력이 자신 안에 있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눈을 띄워주시지 않고 눈먼 이가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만약 눈먼 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서는 주님의 역할은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를 믿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논문 발표를 할 때였습니다. 10여 년에 이르는 노력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날이 다음 날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발표하는 날 잘못되어 학위를 받지 못하는 일도 있기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금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밤새 성당에서 잤습니다. 기도를 드린 시간은 30분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세 시간은 성체조배하고 자려고 했으나 깨어보니 바로 준비해서 나가도 빠듯한 시간이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잠을 잤다는 뿌듯한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전혀 떨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발표하는 자리에 앉아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께 이것저것 공지 사항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엉망이었습니다. 질문하시는 교수들의 말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논문 발표를 논문 방어라고도 불리는데 그런 질문들에 수긍하는 것은 박사 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부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며칠 뒤 논문 점수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점수가 조금은 낮을 줄 알았는데 세 분 교수님 다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준 것입니다. 함께 공부하던 외국 수녀님들이 몇 점 나왔는지 보더니 “난 죽어도 저 점수는 못 받을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한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특별히 도와주신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발표하는 중간에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그냥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못하게 대답해서 실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잘 될 것이라는,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잤으니까. 주님은 그만큼 나에게 보상을 해 줄 것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하지 못해도 믿어주는 분이 곁에 계신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려고 옹알이하는 것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일까요? “넌 능력이 없으니까 내가 도와주어야만 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안에 이미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엄마 아빠는 그것을 믿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믿는 대로 아이는 그것을 해 냅니다. 

만약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어떤 마을에서는 자녀들이 두 발로 걷지 못하고 네 발로 걷기도 합니다. 터키 한 가족 중 5남매가 네 발로 걷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걷게 된 것은 처음에는 근친상간으로 결혼한 부모의 탓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전자 결함 때문에 소뇌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근친상간으로 자녀를 낳은 사람이 많지만 자녀들이 네 발로 걷게 되었다는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뇌가 손상된 다른 형제들은 힘겹지만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결국 ‘습관’ 때문이라는 최종결론이 나왔습니다. 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네 발로 걷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네 발로 걸어도 교정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네 발로 걸었던 이들에게 교정을 시켜주니 어느 정도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믿어주지 않은 것이고 자녀들은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교정 평행봉을 만들어주고 간 몇 년 뒤 이들 중 몇 명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부모처럼 믿어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할 수 있음을 믿어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믿어줄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물 위를 걸어보지 못하고 우리보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마케팅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조서환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장군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장교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수류탄 사고로 한쪽 팔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사랑한다는 아내를 만나 학생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임에도 한쪽 팔이 없다는 것만으로 아이 둘까지 있는 사람을 취직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때 생각났던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내입니다. 자신을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준 아내 때문에 그는 다시 면접장으로 찾아갔고 글을 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한 손만 있으면 되는데 왜 자신을 뽑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의 기백에 결국 합격하게 되었고 장점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마케팅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능력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능성입니다. 씨앗입니다. 그것을 틔워줄 믿어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처럼 되려면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분을 믿고 내가 그분처럼 할 수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믿음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나 행복한 지네가 있었습니다. 친구도 많았고, 자기가 있는 곳은 지네에게 쾌적함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을 것도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항상 “행복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두꺼비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지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행복한 지네야, 너는 어느 발 다음에 어느 발을 내딛는 거니?” 
 
그 순간 지네는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발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어떻게 걸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발이 꼬여서 도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많은 발을 가지고도 발이 꼬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네에 모습에 이런 글을 지었나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모습이 자주 엿보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을 품으면서 가장 쉬운 걷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 될 수 있게 된 지네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자주 체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평소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문을 품는 순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심이 생깁니다. 똑바로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관계가 꼬여 넘어지고 맙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삶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고 있나요? 주님께 불평불만 하면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이 외침은 믿음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예, 주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는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주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했고, 최고의 결과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의심과 의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꼬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꼬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평상시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었다면, 마치 땅을 걷는 것처럼 편안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 소크라테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벌거벗은 겨울의 나목(裸木)을 바라보며 춥고 아픈 이웃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속속들이 아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이야기 하는 곳에 사랑이 없습니다. 입은 열려 있는데 눈은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을 위해 시작한 길에서 사랑을 나눌 수 없고 마음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이 되었습니다. 늘 암담하고 아픈 시간은 주님을 다시 찾는 시간이 됩니다. 

먼저 주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자비를 청하는 마음 아픈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치유는 믿음입니다. 신앙의 길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믿음을 어느 순간 놓치며 살았습니다. 

믿음은 인격적이며 치유는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눈이 열립니다. 소중한 체험은 믿음을 더 깊게 만듭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제 역사를 다시 봅니다. 걸어온 길 모든 시간이 과분한 사랑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가 눈이 열려 하느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믿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은 어떠한 길을 걷느냐보다 더 중요한 어떠한 마음인지를 끝내 보게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 보게되는 기도의 날입니다. 다시 눈이 열리고 다시 마음이 열리고 다시 믿음이 열리는 만남의 기쁜 날 되십시오. 주님께로 열려야 할 것은 우리의 닫힌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주님의 치유를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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