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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6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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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2022년 12월 6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 40,1-1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8장 12-14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6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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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복음
마태 18장 12-14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6일 (화)
양성일 시메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6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6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작은 이에 대한 관심

 

제자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의 긴 설교문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8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17,22-23 참조) 이후에 자리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이야기 배열 순서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고난과 희생으로 얼룩진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갈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작은 이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주제는 마태오 복음 18장의 전반부(1-14절 참조)를 관통하며, 12-13절에서 길 잃은 양에 관한 비유로 강조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14절에 나오는 ‘작은 이’를 길 잃은 양 한 마리에 비유하는데, 이는 제자 공동체 구성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앞서 18장 6절과 10절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어린이”(18,2-5)라는 낱말로 그 의미를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 모두 매우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며(10,42; 25,40.45 참조),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도 길을 잃지 않도록 돌보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작은 이를 향한 관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돌보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동시에 우리도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작은 이를 향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청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제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한 복음이고, 강의 때도 수없이 얘기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말이 오늘 눈에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입니다. 

작은이라! 

잃어버렸다! 

그것도 하나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들을 조각조각 내뱉었는데 그것을 모아 보니 작은이이고 하나이기에 잃어버리는 거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크면 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잃었을 지라도 쉽게 찾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오늘 얘기 중에 앞에서는 <길 잃은 양>이었는데 뒤에서는 <잃은 양>이 되는 점입니다. 그런데 <길 잃은 양>과 <잃은 양>은 주어가 다릅니다.,귀책 사유, 곧 책임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길 잃은 양>은 양이 주어이고 양이 길을 잃은 겁니다. 이에 비해 <잃은 양>은 목자나 공동체가 양을 잃은 거지요. 

우리는 목표를 잃고 방황할 때 길을 잃었다고 하고,그것은 개인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가정의 경우에는 부모가, 수도회의 경우에는 공동체가 목표와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그것은 싫다고,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뛰쳐나가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 더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책임을 냉정하게 개인에게 돌리고 공동체는 책임에서 쏙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분명 인간적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고 신앙적으로도 공동체가 함께 주님께 가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지요. 

이런 공동체에서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어도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이 공동체에서 소외 또는 도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이란 공동체 안에서 소리가 작은 사람, 비중이 작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소리를 내어도 그 소리가 공동체에 들리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작아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에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한 형제가 수도원을 떠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왜 떠나려고 하느냐,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고 하니 이제 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고, 이미 마음이 떠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가려고 하니까 왜 떠나느냐,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 하는데 평소에 자기 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기를 존중해주었다면 이렇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경우 개인이 떠난 것이지만 실은 공동체가 한 형제를 품지 못해 떠나게 한 것이고 잃은 것이며, 그 이유가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시하였기 때문이지요. 

말썽이나 소란을 피워야지만 소리가 들리는 공동체, 애들은 가라거나 애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공동체는 잠재적으로 길 잃은 양과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지 못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양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둔 채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은 매우 교회적이고 사목적입니다. 일단 양들은 ‘산’에 둡니다. 산은 기도하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양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를 잘 모르고 산에 있는 양들에게 집중하면 오히려 양들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일단 양의 우리를 손보고 양들이 빠져나가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첫 번째로 보았습니다. 일단 그물코가 단단히 이어져 있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손보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말하면 저희 본당을 산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은 공동체에 들게 만들어 그 공동체의 친교가 신자들을 잡아놓고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실에 힘을 쏟아야 할까요? 언제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할까요? 이것이 고민입니다. 만약 너무 이른 타이밍에 양들을 찾아 나서면 지금 있는 양들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너무 늦은 타이밍까지 내실만 기하려다 보면 쓸데없는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타이밍을 아는 것이 지혜인 것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엄마가 아이를 믿지 못하여 cctv로 감시까지 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간섭하니 잘한 것도 엄마의 공로가 됩니다.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에게 시선을 돌려서 자녀를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섭하는 만큼 아이의 자존감은 추락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은표 씨 가족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훨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성장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을 때부터 그래도 나의 인생에 책임을 지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고 크게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성당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란 사제의 간섭 없이도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신자들일 것입니다. 만약 대부분이 단체에 가입해서 그 안에서 성장하고 기도하며 봉헌 생활과 성체를 영하는 정도가 된다면 그때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할 때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 단체에 가입하고 감사일기를 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신자 대부분이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 저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갈 것입니다. 

사제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신자들의 자존감은 배가합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양처럼 사제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귀중한 존재임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우리 안에서 스스로 성장합니다. 이때를 알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어느 때부터는 무관심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무관심할 때도 자녀들은 자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곳이 양 떼를 풀어놓는 산입니다. 그 산에는 데려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양들이 산에 있어도 내가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산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산에서 스스로 성장해본 적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압니다. 목자는 그래서 언제 양들을 산에 놓아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정은표 씨 부부는 스스로 성장할 줄 알았던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만 해주면 자녀들이 스스로 성장하는지 압니다. 저는 하.사.시.와 성체조배였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 하고 은총을 찾으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오게 만드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의인은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산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할 줄 아는 자이고, 은총과 진리로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성장할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제 목자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 양들을 신경 쓴다면 양들은 더 피폐해집니다. 

신애라 씨는 딸 둘을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가 이 정도면 아이들이 자기들 스스로 클 수 있음을 알았기에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친자녀들이 너무나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입양한 딸들이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자 수많은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주기로 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잘 키우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수록 친자녀들은 부모가 믿어줌을 알아 더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목자의 도움 없어도 잘 자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 줄 알고, 그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줄 알며, 또 언제 그들을 떠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것을 매번 처음인 듯 대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든다.

 

아는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형제님께서 커피를 무척 좋아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커피를 두 분에게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께서 커피에 손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이 커피 맛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자매님께서 “이이가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간 실수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시지 못하고 있는데 커피를 내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마 커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셨을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선입견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데,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만 맞추는 실수를 얼마나 자주 반복하고 있습니까? 저 자신도 과거와 지금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전에는 쫄면, 짬뽕, 매운 닭발 등의 매운 음식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국어가 더 좋습니다. 
 
저도 이렇게 많이 변하는데 남에게만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일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 상대방의 변화를 탓하는 것 자체가 큰 오류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의 격언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모든 만남이 첫 만남이다.” 
 
이 격언처럼 모든 것을 매번 처음인 듯 대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들며, 관계가 깨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불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모범을 본받아 비록 불완전해도 사랑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이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당신 백성만을 향한 사랑에 집중하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해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닮아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이지만 계속해서 실천해 나갈 때 좀 더 완벽한 주님 모습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럼에도 나는 너를 이해할 거야’라는 의지를 가진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우리는 삶을 계속 살아낼 힘을 얻는다.

- 최혜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길을 잃어 보아야 길의 소중함을 압니다. 길의 주인(主人)은 주님이십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찾아 나서시고 끝내 찾으시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구원이며 사랑이 놀라운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여정입니다. 

광야를 헤매고 풍랑을 만나고 길을 잃고 다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숨 가쁜 여정입니다. 이 사랑의 여정 앞에 사랑받는 우리가 찾아 나서시는 그 대상입니다.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아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뜨거운 사랑을 만난 길 일었던 한마리 양은 주님 사랑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길을 잃고 사랑하기에 되찾는 깊어가는 사랑의 길입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기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은 놀랍습니다.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는 찾아가시는 사랑의 숨바꼭질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알게하는 것이 기다리시고 찾아가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탄생은 기다림이 반(半)이며 기쁨이 반(半)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이 대림시기가 길 잃은 곳에서 몸소 길이 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사랑이 기적(奇跡)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이 화해이며 용서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끝내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길을 잃어도 길을 찾게 하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대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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