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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0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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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만군의 하느님, 어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 위해 키우신 인간의 아들에게 손을 얹으소서. 저희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오리다. 저희를 살려 주소서. 당신 이름을 부르오리다.

 

2022년 12월 10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집회서 48,1-4.9-11)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17,10-13)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0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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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히시어 밤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시고 외아드님께서 오실 때에 저희가 빛의 자녀로 드러나게 하소서.

 

 

복음
마태 17장 10-13절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10일 (토)
양성일 시메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10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10일 (토)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마태 17,1-9 참조)의 후속 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십니다. 앞서 마태오 복음 16장 21절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운명은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이어서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예고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오늘 복음의 중심을 이룹니다. 먼저, 제자들이 엘리야와 그의 역할을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말라키 예언서 3장 23절에 따르면, 엘리야는 오기로 약속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입니다(마태 11,14 참조). 마태오 복음 17장 2-3절에서 예수님과 모세뿐 아니라 엘리야의 발현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의 나타남이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는 메시아의 오심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를 같은 인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마태오 복음 17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사가보다 강한 어조로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척받고 고난받은 엘리야의 예언자적 모습에서 세례자 요한을 보셨고, 세례자 요한의 고난은 다가올 예수님 당신의 고난을 미리 보여 준다고 이해하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런 예언자적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예언자적 활동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열정은 타서 빛이 된다.

 

대부분 남자아이가 그러는 것처럼 저도 어렸을 때 사고를 많이 쳤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큰 사고 중 하나는 제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많은 아주머니가 마당에 솥 걸고 음식을 만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잔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불을 유난히 좋아하여 부지깽이로 불놀이를 하던 저는 부지깽이에 붙은 불로 저희 초가집 지붕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집이 타올랐지만 다행히 어른들이 많이 계셔서 집을 다 태우지 않고 불을 껐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불의 속성을 일찍 깨쳤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고, 불은 번진다는 것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불살라 태워 없애버립니다. 무화하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입니다. 없애야 할 것이 있으면 태워버리면 됩니다. 

불은 또한 번집니다. 작은 불이 그래서 큰불이 됩니다. 작은 빛과 열도 번지면 큰 빛이 되고 열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다 안에 불이 있습니다. 이 화(火)가 화가 되고 이 화(火)가 욕정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화(火)가 욕정(欲情)이 아니라 열정(熱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욕정은 타서 재가 되지만 열정은 타서 빛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불처럼 타올랐던 엘리아처럼 욕정은 타서 재가 되게 하고 열정은 타서 빛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열정이 열정으로 번지고 빛이 더 큰 빛, 그리스도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알아듣지 못하는 욕은 내게 의미로 다가오지 못한다.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를 다룬 ‘프리다’(2002)의 주인공은 셀마 헤이엑(프라 칼로 역)입니다. 그녀는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면서 사회 안에서 자기 역할에 늘 충실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관계에 대한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아무런 힘이 없는 겁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른 언어로 욕을 한다면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알아듣지 못하는 욕은 내게 의미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면 상대의 말과 행동이 나 자신에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대해석해서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상처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이로 인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특히 관계 안에서 상처를 주는 의미가 아닌, 힘을 얻을 수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절대로 욕 먹을 일이 아닌데도,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예수님을 향해 “틀렸다”라며 화를 내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댓글 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사실과 다름에도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데 정말로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에 정이란 것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에 대해 정이 뚝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바치십니다. 하느님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완벽한 인간이시기도 하기에 과연 가능할까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으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에게 했던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꾸짖으시기까지 하십니다. 
 
주님 뜻과 반대되는 모습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를 두고 힘들어하면 할수록 그 잘못된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주님께 향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의미 안에서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패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실패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 찰스 케터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수난과 고난은 어렵고 힘들기에 길을 찾아줍니다. 버려진 역사 뒤에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교만함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다루는 이 마음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신앙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십니다. 분명하게 회개의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말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이들을 핍박합니다. 

신앙은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고난을 감수(甘受)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기다림을 만나는 대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세례자 요한의 피흘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함께 선포됩니다.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십자가로 전달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다루는 교만함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겸손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닦는 십자가의 시간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대림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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