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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3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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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2022년 12월 13일 (화)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스바니야서.3,1-2.9-13)
    구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 오늘 복음
    (마태오복음 21,28-32)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3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거룩한 동정 순교자 루치아의 전구로 저희 안에 믿음의 불이 타오르게 하시어 오늘 그의 천상 탄일을 지내는 저희가 영원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복음
마태 21장 28-32절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13일 (화)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13일 (화)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13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다.

 

어제 복음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반대자들 사이의 논쟁은 오늘 복음에서도 이어집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 21장 25절에서 언급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쟁점이 31ㄴ-32절에서 반대자들을 꾸짖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어제와 오늘 복음을 나누어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였는데, 그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과 그를 파견하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과 하신 논쟁에서 비유 하나를 소개하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한 부류는 특권적 지위에서 그에 따르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런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소외 집단 가운데 대표적으로 세리와 창녀가 후자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를 전자에 속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하면서 그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소개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리와 창녀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우리는 ‘맏아들’에게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귀와 입은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오늘 독서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고, 복음의 주님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아들의 비유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시며 이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꼬집으십니다. 

반면에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한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일까 생각하게 되는데 문득 훈장 기질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저를 많이 반성하는 것이 바로 훈장 기질인데 훈장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가르치는 것이 기질이 되어버려 노상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훈장 기질이 나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르치려고 드는 것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쁩니까? 

제 생각엔 가르치려고 드는 것보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데 특히 오늘 주님의 나무람과 관련지어 보면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쁩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하느님 말씀까지 듣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훈장 기질의 사람은 가르침을 줄 사람하고만 상대하지 가르침을 받을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치는 것만 좋아하지 가르침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르침도 잘 받고 가르치기도 한다면 그것을 훈장 기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르침을 잘 받아 잘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나 성인들은 훈장 기질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먼저 실천하고, 들은 것을 이웃에게 전달하거나 나누는 분들이지요. 

사실 그들의 귀와 입은 다 하느님의 귀이고 입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귀와 입을 자기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귀와 입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않으며 자기를 내세우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가르치고 명령만 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나무라시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공자는 나이 예순이 넘으면 이순(耳順) 곧 귀가 순하고 착해야 한다고 하고 칠십이 넘으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곧 욕심 자체가 하느님 욕심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전보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점점 더 잘 실천하는 저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느님 뜻을 그냥 따르면 되지 굳이 요한을 만나서 그가 알려주는 방법을 믿고 따라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하느님 뜻을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곧 이스라엘 집과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서는 율법, 곧 하느님 뜻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힘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느님 뜻이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행위를 중요시하는 유다인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스윙댄스의 대표주자인 김잔디 씨 이야기입니다. 스윙댄스는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내 몸으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작정 배우면 될까요? 김잔디 씨는 처음에 남성들과 경쟁하는 업체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친구는 몸치, 박치였던 잔디 씨를 믿어주며 “얘는 챔피언이 될 애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의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던 잔디 씨는 남성들과 땀을 흘리며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하는 스윙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믿음, 또 자신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댄스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어 한 마디도 못 하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윙댄스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복장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음악과 남성 파트너, 그리고 잘 짜진 안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 미국인은 김잔디 씨가 어떤 복장의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박자를 원하는지 딱 두 개만 묻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자신도 청바지를 입고 키 작은 김잔디 씨를 자기 코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무작정 무대로 던져버립니다. 얼떨결에 무대로 튀어나온 김잔디 씨는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춥니다. 그리고 첫 국제대회에서 1위를 수상합니다. 

째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려면 먼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력장 5급 받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그랬고 처음 자신에게 용기 있게 춤을 춰 달라고 해도 믿어주고 함께 맞춰주었던 키다리 아저씨도 그러했습니다. 10년 차 때 돈이 안 되는 이 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90세가 넘은 스윙댄스의 전설인 노마 밀러라는 키작은 흑인 댄서의 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무아지경, 곧 나를 버리고 노마 밀러가 되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교회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는 토르는 헬라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여왕과 싸웁니다. 헬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토르를 압도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가 망치를 부수어버립니다. 토르는 망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망치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기 망치에 의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헬라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다. 너도 무슨 신이긴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토르는 사실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망치는 그저 그 힘을 제어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으로 나와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은총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어야 하느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채로,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면 엘리사벳에게 어떤 도움이 되셨을까요? 인간적인 도움을 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 곧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시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그저 자기암시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레베카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을 감당한 능력이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일하게 할 때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되어야만 하느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의 모습 따라가기

 

어느 봉사팀이 티베트 오지 마을로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그곳 어린이에게 방한용품, 의류, 생필품 등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물품을 준비하던 중에 한 여학생이 막대사탕을 사자는 것입니다. 팀원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 돈으로 다른 유용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이 여학생은 사비를 털어 막대사탕을 사서 갔습니다. 
 
이 오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의류와 생필품, 그리고 방한용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여학생이 사비를 털어 준비한 막대사탕이었습니다. 의류, 생필품, 방한용품을 받고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막대사탕을 받아 사탕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을 때까지 계속 웃고 있는 것입니다. 막대사탕으로 추위를 피할 수도 없고 또 굶주림을 해결하지도 못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는 모든 봉사자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만 있으면 그만일까요?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행복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행복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두 아들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맏아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말에 싫다고 하고서는 마음을 바꿔서 일하러 가고,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냐고 하면 당연히 맏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맏아들 같은 이가 세리나 창녀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처음 모습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종교 지도자인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로만 할 뿐 행동으로는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만 주시는 하느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강조하신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맏아들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다른 아들의 모습인가요? 세리나 창녀의 변화된 모습인가요? 아니면 변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인가요? 지금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늘 명심하라. 해내고 말겠다는 너의 결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단 사실을.

- 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는 믿음입니다. 믿지 않으면 따를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향할 곳은 믿음이라는 삶의 포도밭입니다. 포도밭은 치열하고 믿음은 치열한 삶을 다독입니다. 믿음의 포도밭에는 오직 믿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바꾸는 우리의 회개를 원합니다. 믿음의 핵심은 그래서 회개입니다. 회개하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교회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선물은 회개와 실천이라는 복음의 선물이었습니다. 믿음은 특정한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풍요로운 관계입니다. 관계에 충실해지는 삶이란 회개로 다시 하느님을 향하는 삶입니다. 

삶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회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진실되고 회개는 그릇된 삶을 바꾸는 기쁜 실천입니다. 믿음은 기쁨을 향합니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가르쳐 줍니다. 기쁘게 생각을 바꾸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은 빛을 향하는 생활의 변화입니다. 믿으면 믿을수록 깊어지는 회개이며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더 기뻐지는 기쁨의 삶 빛의 삶입니다. 믿음의 빛은 어둠을 밝히며 포도밭을 밝힙니다. 빛에 감사하는 회개의 오늘입니다. 뜻과 실천은 다시 포도밭을 기쁨으로 영글게 합니다. 기쁜 믿음 기쁜 대림 기쁜 회개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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