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4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4.
반응형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2022년 12월 14일 (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5,6ㄴ-8.18.21ㅁ-25)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 오늘 복음
    (루카복음7,18ㄴ-23)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에게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뵈옵게 하소서.

 

 

복음
루카 7장 18ㄴ-23절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그때에 

18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19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2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14일 (수)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14일 (수)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14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내일 복음(루카 7,24-30 참조)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드러나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원, 그리고 이 두 인물의 상호 관계를 보여 줍니다. 짝을 이루는 이 두 개의 일화는, 예수님께서 병자(백인대장의 종, 과부의 외아들)를 치유하시는 두 가지 사건(7,1-10.11-17 참조)과 죄지은 여인을 용서하시는 사건(7,36-50 참조) 사이에 자리합니다. 이로써 병을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역할이 부각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전해 듣고도,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분이 정말로 ‘오실 분’이신지 여쭙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일대에서 행하신 가르침과 기적 행위는 세례자 요한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앞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며 그분을 ‘심판자’로 소개하였습니다(3,9.17 참조). 그런데 그가 자기 제자에게 전해 들은 예수님의 활동 모습은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의 정체를 입증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의심에 찬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답하십니다. 먼저 병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을 몸소 보여 주십니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언어로 당신께서 보여 주신 치유 활동을 묘사하시면서(이사 26,19; 29,18; 35,5-6; 61,1 참조), 보고 들은 것을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구약의 예언이 완성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당신을 보여 주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약한 이, 작은 이, 가난한 이와 함께 계시며 그들의 아픔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 곧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병주고 약주는 하느님

 

“이제 알아라. 나 외에는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주는 것도 나다.”(신명 32,39)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이사 40.6-7) 

우리는 하느님을 얘기할 때 구원자 하느님을 얘기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얘기할 때 치유, 해방, 구원의 하느님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병 주는 하느님은 얘기치 않고 약 주는 하느님만 얘기하는데 사실은 하느님이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빛을 창조하셨지만 창세기를 보면 빛이 있는 낮과 빛이 없는 어둠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생명의 샘이 진정 하느님께 있지만 생명이 끝나는 죽음도 있게끔 우리의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둠이니, 죽음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들은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창조의 그늘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이 없도록 우리 생명을 만들지 않고 죽음이 있도록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병을 주신 것이고, 애초에 어둠이나 그늘이 없도록 빛을 만드셨으면 될 것을 어둠이나 그늘이 있도록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병을 주셨으며 애초에 영원한 행복을 주셨으면 될 것을 이 세상에서는 끝이 있는 행복을 주심으로 불행이라는 병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과 피조물을 이렇게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병 주시는 하느님이라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영육의 모든 질병에서 우리를 구하시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는 예수님은 약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여기서 저는 질문을 합니다. 왜 병을 주고 약을 주셨을까? 병을 안 주셨으면 약을 안 줘도 될 텐데 왜 병을 주셨을까? 다시 말해서 구원이 필요 없게 완전한 창조를 하셨으면 구원이 필요 없을 텐데 왜 구원이 필요하게 창조를 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실 구원을 왜 창조 때 진작 이루시지 않으셨을까? 

구원자를 보내시고 약을 주신 것은 참으로 고맙지만 병을 주신 것은 못내 아쉽고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창조의 그늘이 아니라 창조의 실패가 아닐까요? 창조의 실패를 구원으로 보완 보상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아둔한 제 머리로는 이런 창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게 이해하자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이렇게 하신 것도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신 사랑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당신의 미완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완성하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이 완성하라는 것일까요? 

사실 천국이 아니라 유한한 이 세상에 창조하시는 한 그 창조에 생명도 끝이 있고 행복도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겸손하다면 이 찬류세상(竄流世上)을 원망하지 않고 교만하지만 않다면 여기서 시작된 창조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케 하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

 

.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자신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아이가 예쁘다는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랍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 되어 많은 기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에게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도 동생과 비교하면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랑이라는 기대감이 너무 부담된다는 첫째의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또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고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둘째 역시 힘듭니다. 첫째가 쓰던 것을 물려받고, 교육의 혜택도 첫째만큼 못 누립니다.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외동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이 짊어질 무거운 짐 한 두가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짐만이 보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짐은 자기 짐보다 너무 가볍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칭호에 대해 의심하면서, 믿음에 대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고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에인카렘에서 만나셨을 때, 즉 뱃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의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늘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완벽해 보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말이지요. 
 
자기 짐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짐이 무겁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 곁에서 볼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의심을 품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충격적이고 독특한 것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따뜻하고 좋은 것을 주면 된다. 좋은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

- 팀 페리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십자가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십자가가 빛이며 십자가가 창조한 참된 정화입니다. 빛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전하고 있는 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참된 깨달음은 빛처럼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참된 스승은 우리를 제대로 살게합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빛을 만드시는 분을 어둠을 창조하는 분을 알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입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한 것을 내려주지 않으시면 생명은 생기를 잃게 됩니다. 
기다림은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구원을 향합니다. 구원은 의심을 품지 않는 빛의 행복입니다. 십자가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의 참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이기에 사랑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순 없습니다. 사랑은 혼돈에서 창조를 허물어진 곳에서 다시 세워지는 굳건함을 체험케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돌아서는 사랑의 체험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은 사랑의 창조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를 바꾸고 삶의 자리를 다시 보게 하는 사랑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놀라우신 하느님 사랑을 맛 보았기에 그 사랑의 이끄심에 자신의 삶을 맡깁니다. 

기다림은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 기다림 없는 성탄은 부끄러운 우리들 자화상입니다. 십자가로 기다림으로 다시 돌아가는 행복한 사랑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