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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5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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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2022년 12월 15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54,1-10)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은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7,24-30)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는 사자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5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주님, 주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가 죄를 지어 괴로워하고 있사오니 외아드님께서 오실 때에 구원의 기쁨을 주소서.

 

 

복음
루카복음 7장 24-30절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는 사자다.

 

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26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27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29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30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15일 (목)
박재찬 안셀모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15일 (목)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 팔로티회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2년 12월 15일 (목)
오후 3시 시작합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집니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라는 시간의 표현은 어제 복음과 직접 연결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당신께 의심을 품었던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마태 11,2-11도 참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이면서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평가하십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을 인용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을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자 파견된 사자이자 다시 돌아온 엘리야로 소개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세례자 요한의 인간적 탁월함을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엇갈렸습니다.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까지도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의 의로움을 인정하였던 반면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차지하는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구원 목적의 완성을 위한 그의 역할을 설명하시며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관점에서 회개하지 않는,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은 ‘독사의 자손’입니다(루카 3,7 참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의 가르침을 듣고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 ‘오실 분’께서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물리쳐야 할 것들

 

오늘 복음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는 주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위한 당신 뜻도 가지고 계셨다는 뜻이고 주님도 이들을 당신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으셨고 사랑에서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고, 그래서 결국은 주님의 구원과 사랑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오늘 우리는 ‘물리칠 것을 물리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우리가 물리쳐야 할 것은, 악과 악마이지 하느님과 하느님 뜻은 아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객관적으로 보고 남의 얘기처럼 얘기하면, 물리쳐야 할 것은 악과 악마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멀리 구원을 바라보지 않고 당장 나의 좋고 싫음만 보기 때문입니다..당장 내 입에 단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는 것이고, 병을 고쳐주는 약을 쓰다고 뱉는 아이와 같습니다. 물리쳐야 할 것은 약이 아니라 병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유하면 너무도 그 이치를 잘 볼 수 있는데 우리 자신의 실제를 보면 구원은 멀고 쾌락은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프란치스코는 이런 경고성 권고를 합니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적습니다.” 

구원은 멀고 쾌락이 가까운 미성숙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요한의 세례란?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 이전에 이미 요한의 세례에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요한 7,29-30)

이 말씀에 따르면 요한의 세례는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뜻’이라고 번역한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스어로 ‘불레’라는 이 단어는 “계획, 의도, 목적”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닌 ‘이전에’ 세상을 향한, 혹은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이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면 첫 피정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를 생각나는 것부터 쭉 써보라고 합니다. 저는 왜 그런 것을 쓰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 기억부터 쭉 쓰면서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처음부터 부르고 계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한 가장 중요한 책이 하.사.시.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부러움에 사제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저의 모든 판단의 기준은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밖이 더 행복하게 보이면 바로 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하면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선택의 기준은 바로 저의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부터 행복을 찾게 하시고 그 행복을 통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예정설’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따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고 나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물리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면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계획이 더 행복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만들어진 이, 곧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항상 옳은 분이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이승복 박사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체조선수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척추 손상으로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물론 손가락도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당신을 좋은 일에 쓰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는 그 말을 믿었고 최고의 재활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체조선수의 꿈은 딸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는 항상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듭니다. 이 의도가 ‘불레’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도 하느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하늘과 땅은 두 상반되는 극과 극을 상징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이시라면 인간은 땅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벌입니다.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먼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이 어떻게 하늘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순종하면 됩니다. 인간의 몸 안에 산소가 없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 산소는 하늘의 것입니다. 인간은 공기를 마시며 그 공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땅이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 안에 머물면 땅도 하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여자의 몸에서는 난자가 만들어집니다. 그 난자는 여자의 몸 밖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짧은 한 달의 주기를 끝으로 죽고 맙니다. 난자가 더 오래 사는 법은 밖에서 자신을 초대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자입니다.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여자의 몸 밖에서 살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살게 됩니다.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은 다 이렇습니다. 

성자께서는 하늘에 속한 분이시지만 직접 땅의 인간이 되셔서 어떻게 하늘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보여 주어야 인간이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마르 14,36; 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도 하늘에 아드님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써 땅의 육체를 지닌 인간도 하늘에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원리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고 인간은 땅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은 남자로 땅은 여자로 봅니다. 신약성경에 와서는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교회가 신부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서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요한 1,12)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어린양과 혼인하게 됩니다(묵시 21,1: 9-10 참조). 교회는 진정 “흠 없는 어린양의 흠 없는 신부”(796항)입니다.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이라 부르고 몸으로서 자신을 신부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796항 참조).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이 완성되고 그때가 창조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입니다(묵시 21장 참조). ‘하늘과 땅’의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결합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주님 창조의 계획입니다. 다만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 속한 땅’이 됩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부터 흙으로 된 모든 인간을 하늘에 속하게 하시기 위해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분명 하늘의 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순종하는 일로 성취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주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일이 하느님을 의롭지 않은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은 만든 것에 책임을 지십니다. 자녀가 자녀가 되는 것이 자녀의 행위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의 계획에 따름이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이고 생명을 지속하는 길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받음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창조자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매 순간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으며 살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밥먹는 행위의 해석 방법

 

한 아이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는 밥 먹을 때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겨우 반이고 나머지는 다 바닥에 흘려요.” 
 
이 어머니의 입장에 서서 아이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음식을 낭비하고 있잖아. 엄마 화났어.”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안 먹고 싶은 것을 버리다니. 왜 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널 위해 힘들게 식사 준비했는데 함부로 흘리다니, 엄마의 가사노동을 무시하는 거야?” 
 
이런 부정적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먹고 싶을 때는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고, 우리 아이는 주관이 확실해.” 
 
“얼마나 맛이 없으면 먹으면서 버릴까? 그래도 참고 먹느라 고생했어.” 
 
“밥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렸구나. 아이는 밥도 장난감이 될 수 있다니까.” 
 
밥을 먹는 행위로도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석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집니다. 앞서 부정적 생각을 했을 때는 화와 분노가 나오고, 긍정적 생각을 했을 때는 사랑의 마음이 나옵니다. 화, 분노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긍정적 생각으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한 번 더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주님의 앞길을 잘 닦아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나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세례받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는 부정적 생각으로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활동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미치광이처럼 판단합니다. 전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하느님의 뜻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더 가까이에 계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하나다.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답게 일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성장한다.

- 이정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사람의 길은 사람이며 사람에 앞서 사람다움을 일깨워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삶이 곧 나를 위하는 삶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느님보다 앞서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실 하느님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사람의 평가는 곧 하느님의 평가입니다.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펼쳐집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외적인 시각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내면의 길을 닦습니다. 내면의 길은 말씀이며 겸손이며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세례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의 시작은 뜻을 세우는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사람은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은 어디에 사는지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냐의 가치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마음은 가치를 향하고 가치를 닦습니다. 사람의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길을 가지 않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보내고 또 보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마음의 눈(目)을 다시 닦으며 다시 말씀의 마음으로 돌아서는 시간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할 하느님의 뜻을 요한 세례자는 믿음으로 실천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믿음을 만나는 믿음의 대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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