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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12/17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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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산들은 백성에게 평화를, 언덕들은 정의를 가져오게 하소서. 그가 가련한 백성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에게 도움을 베풀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2022년 12월 17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2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49.1-2.8-10)
    왕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 오늘 복음
    (마태오 1,1-17)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2월 17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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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복음
마태오복음 1,1-17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2년 12월 17일 (토)
김일현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2월 17일 (토)
김주신 멜키올 신부 집전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2년 12월 17일 (토)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는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셉은 예수님을 낳았다.” 대신에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15절까지 줄곧 사용한 능동태 문장이 아니라 수동태 문장이 사용된 이유는 단순히 다윗 가문의 계보를 나열하는 문학적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16절의 수동태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의 탄생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태 1,18.20 참조). 또한 이러한 문학적 형식의 파괴는 예수님의 족보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1,18-25)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줍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윗 가문 출신이시지만 성령의 힘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먼저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바라봄’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 둘째 부분을 시작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들

 

잘 아시다시피 대림 시기는 둘로 나뉩니다. 

17일 이전의 대림 제1시기와 이후의 대림 제2시기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1주일을 앞둔 17일부터는 주님께서 오실 것을 준비한 사람들을, 멀리서부터 가까운 사람까지 얘기하는데 그 첫날인 오늘은 족보상의 인물들을 열거하며 멀리서부터 준비한 사람들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오늘 전례의 의미를 전합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러니까 오늘 복음과 본기도를 엮으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우리 인간도 그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족보를 보면서 든 느낌은 족보의 인물들이 대부분 추하고 더럽다는, 그래서 주님께서 족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치 똥물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뿐 아니라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악취가 풀풀 나는 더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똥물 속으로 들어오신 거지요. 

그런데 누가 똥물에 들어간다면 왜 들어가겠습니까?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똥물에 들어갈 사람도 없고 이유도 없겠지요. 그리고 똥물에 보석이 있을 때 들어가겠지요. 그 보석을 건지러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보석같이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우리 인간을 건지러 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인데, 이것은 마치 사창가에 팔린 딸을 찾으러 사창가에 들어가고, 조직 폭력배에 끌려간 아들을 찾으러 조폭들 가운데 들어가는 부모 같습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아무리 더럽혀졌어도 소중하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자기가 깨끗하게 할 책임이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야 할 책임, 당신의 창조를 회복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창조의 회복이고, 그러니까 본래 보물인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 때의 그 고귀함으로 되돌리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하러 오신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뿌리치지만 않으면 됩니다. 뿌리치지 않고 마주 잡기만 하면 우리는 구출되고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이 회복됩니다. 

오늘 본기도의 기도처럼 인성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성에 참여하려는 갈망을 가지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무기력한 상황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실험실의 개는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에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상자로 옮겨줘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웅크린 채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만 그럴까요?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즉, 인간 역시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부정적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어떤 시도나 노력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주장했습니다.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 개념을 통해 지금의 무기력한 상황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그는 전문직의 사람부터 평범한 일반 사람까지 많은 사람을 상담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무기력에 빠져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충분히 그 시간을 피하려 하는 나의 변화가 필요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도 커다란 목표가 아닌 지금 당장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기력의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보면, 계속 안 좋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변 국가 중 가장 힘이 없어 강대국으로부터 점령당하고, 유배 가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일까요? 이스라엘은 힘없고 고통과 시련의 삶만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으로 무기력의 상황에 부닥쳐질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을 보려 하고 함께했던 이스라엘의 조상 덕분에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면서 포기하고 좌절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는 상황이란 없습니다. 내가 바뀌려고 노력하고, 또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삶은 주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무기력의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비겁한 자는 평생에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오직 한번 죽는다.

- 김만술 대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 탄생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듯 모든 역사를 우리들에게 개방하십니다. 믿음의 역사는 실수와 허점까지도 감사하게 하는 은총의 역사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는 빛의 탄생과도 같습니다. 

빛은 우리 신앙의 발자취를 모두 비추어 줍니다. 충실과 불충실 부끄러움과 회개 죄와 구원을 우리 역사 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새로운 삶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지 않습니다 기억하며 새롭게 교훈을 찾습니다. 구원과 완성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며 하느님의 뜻이십니다. 하느님의 뜻 구원의 절정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은 믿음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느님 탄생의 역사를 받아들이듯 우리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조건과 신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적은 모든 시간의 구원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저마다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탄생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섭리(攝理)와 선물(膳物) 사이에 역사가 있고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느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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