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2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23.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1년 1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23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주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리라고 예언합니다.

 

 

✠ 오늘 복음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요한이라고 이름 짓자,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다. 이웃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합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12월 23일 (목)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말라 3장 1-4절, 23-24절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장 57-66절

 

세례자 요한의 탄생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신 저희에게 평화를 주시어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오실 때에 등불을 밝혀 들고 마중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3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2월 2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우리의 신앙은 놀라움과 감사함의 기쁨에 넘치고 있습니까?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함께 기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하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가 베풀어졌기에 그들은 더욱 기뻐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그토록 기대하였건만, 점점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음에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은 사람들을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리라고 합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귀가 막히고 입이 닫힙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여드레 되는 날,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계약의 표시요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는 표징인 할례를 하고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할례와 함께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름은 한 사람이 가족이나 이웃들과 관계를 맺어 자기 신원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사명이나 역할을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짓는 전통에 따라 아기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자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 아이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기에 이름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는 뜻을 가진 ‘요한’으로 정하여 그 아이가 뒤에 오실 구세주의 길을 닦는 선구자요, 하느님 은총의 증거자이며, 빛을 증언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할 증인임을 밝힙니다.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씀으로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어, 즉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섭리 앞에서 놀라움과 감사함의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놀라움과 감사함의 기쁨에 넘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정련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러면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 성탄을 하루 앞둔 오늘 교회 전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얘기를 전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제련사와 정련사로 얘기합니다. 

제련은 광석에서 금속을 빼내는 것이고, 정련을 빼낸 금속을 더욱 순수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이런 정확한 구분없이 비슷한 뜻으로 두 말을 쓰는 것은 둘 다 무엇에서 무엇을 빼냄으로서 순수하게 만드는 공통점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오실 주님을 합당하게 맞이하게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무엇을 빼내고 무엇을 순수하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당장 생각나는 것은 사랑에서 미움을 빼냄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순수하게 하는 것이지요. 

저에게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사랑을 받고도 싶어하지만 더 원하는 것은 주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개나 꽃이라도 사랑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러므로 인간이건 개건 꽃이건 사랑이란 것이 다 귀찮아지면 그런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운 거라는 얘기가 있지요. 

그런데 제게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또다른 믿음도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미움이라는 불순물이 예외 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성인일지라도 그의 사랑에 미움이라는 불순물이 있는데 성인과 속인의 차이는 그 불순물이 얼마나 적고 많으냐의 차이일 뿐이고, 불순물이 적을수록 불순물이 전혀 없으신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간 거지요.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열망과 갈망에서 욕망을 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에서 미움을 빼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사랑인 열망과 갈망에서 세상 욕망을 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욕망이란 우리의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이 빠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랑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이 빠지고 하느님 사랑만 남아야 하는 것과 반대지요. 

그러므로 이 대림절 막바지에 우리의 사랑에서 미움을 빼내는 것은 물론 세상 욕망을 빼냄으로써 주님과 주님 사랑이 우리에게 오실 평탄한 길을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마련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미움받을 용기를 주는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은 까닭에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지으려고 합니다. 당시 보통은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즈카르야를 바라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때 지금까지 묶여있던 혀가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느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혀가 묶이는 고통을 통해 세상에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이 나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세상 사람들 시선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을 어쩌면 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대체 미움받을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우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쥔 냄비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면 그 냄비를 놓으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습니다. 흰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하지 말아보십시오. 지금 3초간 느닷없이 나온 북극곰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뇌는 무언가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그 생각에 집중하게 되어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먼저 지금 시각이 몇 초 몇 분인지 정확하게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다른 것에 신경쓰면 됩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이 평생 내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꾸르실료 한 봉사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대낮에 건널목을 건너는데 음주 운전자에게 치인 것입니다. 워낙 심하게 다리를 들이받아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다면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꾸 생각을 부정적으로 끌어내리는 자아가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낮에 나에게 교통사고를 낸 그 사람의 잘못은 분명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는 꾸르실료 봉사자는 절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를 낸 사람이 자주 찾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 사람도 옆 본당에서 핵심 봉사자까지 하다가 어떤 연유로 몇 년 동안 냉담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사고를 낸 사람과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 사건이 ‘좋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혀가 묶인 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반성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즈카르야로 짓겠다고 고집부렸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나의 것으로 삼는 사람은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긍정적인 축복’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줍니다. 판단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안톤 룰릭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1996년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자리에 초빙되어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안톤 룰릭 신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 중에 십자가의 장막을 넘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심장이 찢어졌을 때 장막도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때 장막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 장막을 통과했을 때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나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 모든 일이 ‘좋은 것’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좋은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의 힘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은 그래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뜻을 얼마나 굳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외도로 아내에게 큰 상처를 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깊이 깨달았고, 평소 죗값을 치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에게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은 하지 못한다면서도 미움을 겉으로 표시했습니다. 부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보면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꼬투리 잡아 평생 종으로 부리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아내는 남편을, 또 반대로 남편도 아내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용서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랑했던 만큼 배신을 느끼면 그만큼의 미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잘해야 합니다. 그만큼 사랑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받을 수 있는 계속된 노력만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즉, 자신의 신앙생활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이를 만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습니다. 이 할례식 때 일반적으로 이름을 짓는 명명식을 동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름은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용이 아니라, 일생 동안 그들이 할 사명을 가리키는 일종의 예언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명명식이 중요했습니다. 그 권리는 부모에게 때로는 친척들에게도 개입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지 않는 한 보통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 통례를 따르지 않고 ‘요한’으로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묻자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일러준 말을 듣지 않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하느님의 뜻을 새기는 데 노력했고, 더 굳게 믿고 따르는 데 집중했기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을 얼마나 굳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믿고 따라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둡다고 투덜대지만 말고, 어서 작은 촛불 하나부터 밝혀라.

- 공자

 

 

유혹에 이기는 법

 

어느 자매님이 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와서 기도를 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도를 멈추면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줄게.” 
 
이 유혹을 이겨내자, 이렇게 유혺합니다 . 
 
“지금 기도를 멈추면, 아들이 서울대에 갈 수 있도록 해줄게.” 
 
이 유혹도 이겨냅니다. 그러자 이렇게 유혹합니다. 
 
“지금 기도를 멈추지 않으면, 아들이 크게 아플거야.”
힘들었지만 생명의 부분은 하느님 영역에 있다는 말을 기억하며 이겨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귀는 이렇게 유혹합니다. 
 
“지금 기도를 멈추지 않으면, 옆집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고 그 집 아들이 서울대에 갈 것이다.” 
 
이 말에 결국 기도를 멈추었다고 합니다. 남과의 비교, 이 비교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비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오늘도 빼놓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시는 성실하신 주님의 손길이다. 모든 탄생은 어김없이 성실하다. 성실함의 탄생이다. 보살피시는 주님의 손길로 하느님 나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이와같이 삶이란 정답이 없는 사랑만 있을 뿐이다. 

사랑말고 다른 소명은 없다. 탄생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은 탄생을 향해 있다. 탄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정말 멀리있지 않음을 보게된다. 탄생은 이제 시작이듯 우리는 우리를 다듬어가는 아름다운 손길을 필요로한다. 

먼저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이시다. 잊지 못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다. 때를 놓치지 않으시는 사랑이다. 사랑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 구약(舊約)의 마지막 예언자의 세례자 요한은 신약(新約)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다. 

탄생의 공명(共鳴)은 구원의 공명으로 우리모두를 울리고 있다. 사랑의 울림 안에 우리가 있다. 드디어 한송이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듯 사랑의 신비가 시작되었다. 조금 있으면 하느님의 탄생 성탄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 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