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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12월 2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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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12월 22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한나는 사무엘을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이라며 그를 주님께 바치겠다고 엘리에게 말합니다.

 

 

✠ 오늘 복음

 

마리아는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에게 큰일을 하셨다며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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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사무 1장 24-28절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그 무렵 사무엘이 

24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힘센 용사들의 활은 부러지고, 비틀거리던 이들은 힘차게 일어선다. 배부른 자들은 양식을 얻으려 품을 팔고, 배고픈 이들은 더는 굶주리지 않는다. 아이 못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 아들 많은 여자는 홀로 시들어 간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나이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루카 1장 46-56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에게 힘을 주시어 저희가 믿음을 증언하는 삶으로 구세주를 기쁘게 맞이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택훈 베드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2일 (수)
김택훈 베드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2021년 12월 22일 (수)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말씀’을 잉태한 그 사랑의 빛이 이제 우리 안에 머무릅니다.

 

말씀은 기쁨의 빛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구약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 나자렛 출신의 한 여인에게 말씀이 찾아와 그 맑은 마음 안에 머무릅니다. 

메시아와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비천한 종’을 하느님께서 굽어보십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당신 종에게 머무르시니, 그 마음에 영혼의 빛이 들어섭니다. 그 영혼을 밝히는 빛은 감추어 놓을 수 없어 기쁨의 노래로 울려 퍼집니다.

말씀은 사랑의 빛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큰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의 땅 이집트를 탈출하도록 큰일을 일으키신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시고, 그분의 탄생으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시작하십니다. 

‘말씀’을 잉태한 그 사랑의 빛이 이제 우리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실한 우리 안에 머무르고, 그 말씀을 간직한 우리에게는 사랑의 빛이 들어섭니다.

말씀은 희망의 빛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교만하여 하느님과 원수가 된 자들을 흩어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통치자들을 끌어내리시고, 움켜쥐고 자기만 위하는 부유한 자들을 내치십니다. 그리고 비천한 이들은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 한 모퉁이에 머무릅니다. 말씀이 머무는 자리엔 희망의 빛이 들어섭니다. 그렇게 들어온 빛은 감추어 둘 수 없기에 기쁜 노래로 세상을 밝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찬미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찬미.
오늘은 그 유명한 막니피캇 곧 마리아 찬가입니다. 찬미는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자만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찬가는 겸손과 믿음의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찬가는 우선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우러러볼 때 나오는 노래이고 그렇기에 겸손하지 않은 자의 입에서는 찬미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상이 가지요. 교만한 자의 입에서 찬미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고, 마리아처럼 자신을 종이라고 하고 비천하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다음으로 찬미는 비천한 나도 굽어보시는 하느님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비천한 사람을 하느님은 결코 깔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기도 하지요. 

굽어보는 것과 깔보는 것, 모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굽어보는 것은 비천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눈을 낮추며 가엾이 보는 것인 데 비해 깔보는 것은 그야말로 깔아뭉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굽어보시기도 하고 깔보시기도 하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서도 편견이 있는데 하느님은 깔보시지 않고 굽어보시기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나의 찬가와 마리아의 찬가에서 하느님은 양면적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하느님 체험은 바로 양면적인 체험이어야 하고, 우리의 진정한 겸손과 믿음, 우리의 진정한 이해와 찬미, 이런 것들은 바로 양면적인 하느님 체험의 열매입니다. 

양면적인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 겸손할 수 있고 올바른 믿음을 가질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서만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나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림 시기,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데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양면적인 하느님 체험이 실현되는 것이고, 그때는 마리아의 입에서처럼 찬미가 우리 입에서도 나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기 성취가 커질수록 기쁨이 줄어드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주님께서 당신을 도구로 쓰시어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들이 성령으로 기뻐 뛰게 하심을 보며 당신도 기쁨에 넘쳐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찬미를 올립니다. 

성모님은 참 기쁨이 자기 뜻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기쁨의 원천은 나를 만드신 분이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내가 그분 뜻에 나 자신을 맡겼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나에게 실현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 기쁨입니다. 나의 힘으로 성취한 일은 오히려 행복을 갉아먹습니다. 성공과 함께 자아도 커져서 나의 기쁨을 다른 사람의 인정에서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로 현대에도 유명해진 궁예는 천민으로 태어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루어낸 엄청난 성취는 그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초대 왕이 되었음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성취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관심법이라는 명상을 하고 있을 때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히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마군이를 죽이기 위해서였을까요? 자아가 너무 커져서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대로 무언가 성취한 사람은 그 성취와 함께 자아도 커지기 때문에 기쁨을 외부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에서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존중해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세상에서의 성취는 나의 자아와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마치 ‘아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덩치는 커지는데 목구멍은 작아져서 몸이 커질수록 점점 배가 고파지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기뻤던 때는 시험을 너무 못 보았는데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갔을까요? 하루도 못 간 것 같습니다. 바로 등록금을 걱정을 해야 했고 대학에 들어가니 또 군대와 취직 걱정이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룬 기쁨은 이렇게 오래 걸리고 짧게 끝납니다. 그리고 옆에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간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은 바로 끝나고 맙니다. 

반면 책 『단순한 기쁨』은 빈민구호 단체인 ‘엠마우스’를 만들어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보낸 아베 피에르 신부님의 일생이 왜 기쁨을 수밖에 없었는지 적은 책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나 19세 때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엠마우스를 만들어 평생 고통받는 가난한 약자들을 위해 사신 분입니다. 지금의 엠마우스는 전 세계 44개국, 350여 개의 단체가 되어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분이 엠마우스를 시작할 때 첫 조력자요 협조자였던 사람은 자살 직전의 위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부님을 불러 가보니 그 사람은 자살 외에는 더는 살 의미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사람의 일생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정부였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가정부였지만 주인이 죽으면서 물려줄 재산을 받을 친척이 없자 주인은 가정부인 그 사람의 어머니에게 재산을 상속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재산을 노린 많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접근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혼인했음에도 재산을 아버지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아들이 결혼하려고 하자 모든 재산을 잃을까 봐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을 깨기 위해 편지를 대필하여 아들의 애인에게 보내 둘이 헤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마련한 한 여인과 아들이 결혼하게 합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아들은 총을 들고 아버지와 편지를 대필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어찌하다 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고 편지를 대필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불이 났었는데 그는 목숨을 걸고 다른 죄수들을 도왔고 그 덕분으로 그는 사면을 받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시 아내는 모든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고 딸도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쫓겨난 처지가 된 그는 당시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던 결핵에 걸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피에르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살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엠마우스라는 것을 하려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도 죽기 전에 신부님 일을 조금이나마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15년 동안 엠마우스의 최고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신부님을 도와주고 결핵으로 죽습니다. 그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신부님께서 그때 제게 돈이든 집이든 그저 베푸시기만 했다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이유를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진 스마트폰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스마트폰에 이성이 있어서 살아갈 의미를 알아서 정하라고 하면 그 스마트폰은 올바른 살아갈 의미를 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살아갈 의미는 자신을 만든 이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살아갈 의미를 살아갈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 ‘기쁨’입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 사용될 때 가장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으로 살아갈 때 가장 기쁩니다. 따라서 나의 힘으로 이룬 성취로 나의 기쁨을 찾겠다는 말만큼 어리석은 말이 없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자아를 공룡처럼 커지게 하겠다는 말인데, 이 세상에는 공룡을 기쁘게 할 만한 음식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삶의 기쁨을 내 뜻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작아져서 자신 안에서 주님께서 일을 성취하시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기대하지 못했던 성취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신 일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기에 불만족의 블랙홀인 자아가 설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주님께 나를 내어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놀라우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하건 나는 나를 통해 주님의 업적을 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가 나에게서 드러나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 뜻을 따르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짧은 고통은 있지만, 아주 오랜 기쁨이 뒤따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도 없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룬 성취는 오히려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조금이나마 있었던 기쁨과 행복을 갉아먹는 독이 됨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우애가 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형의 동생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었지요. 그런데 형이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부탁을 하나 해야 할 것 같다. 내 재산을 이렇게 정리해주었으면 한다. 네가 원하는 만큼을 형수에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가지렴.” 
 
형이 하늘 나라에 가고 나서 재산을 정리하니 30억이었습니다. 동생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형수에게 1억을 주고, 자신이 29억을 가진 것입니다. 형수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동생에게 “본인이 원하는 돈은 29억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요. 그러자 판사는 “그러면 형수에게 29억을 주고, 동생은 1억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형이 ‘동생이 원하는 만큼을 형수에게 주고, 나머지는 동생이 가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잘 품지 않는 우리는 아닐까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지지 못한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모님의 노래를 듣게 됩니다. 이 노래는 성모님께서 천사의 기쁨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찬양의 인사를 받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이 베푸시는 사랑에 흠뻑 젖어 절로 읊은 응답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와 엘리사벳은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인사하였고, 성모님도 성경에 있는 말씀을 회상하면서 응답송을 읊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한 구원사업에 감격하여 마음과 정신이 온통 하느님께 찬미의 정으로 휩싸입니다. 구약시대의 제관이며 예언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제1독서에 볼 수 있듯이, 아기를 못 낳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통해 사무엘을 낳게 되자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요. 성모님도 같은 맥락에서 온 세상 하느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읊으신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런 노래가 가능했을까요?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세상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하늘 나라의 행복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성모님과 같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참된 행복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언제나 현재에 집중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 파울로 코엘료

 

 

걱정하지 마라.

 

성경을 보면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늘의 새와 들에 핀 꽃 이야기를 하시지요. 여기서 우리가 묵상해 볼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하늘의 새를 보면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어렸을 때 집에 제비집이 있어서 제비의 움직임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둥지를 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새끼가 부화하면 곤충과 벌레를 잡아 새끼 주둥이에 쉴새 없이 넣어줍니다. 
 
들에 핀 꽃도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지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즉 깊은 신뢰와 커다란 안정 가운데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죽음을 마치 전기가 끊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단계로 보기에 희망 속에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주님께 희망을 두며 확실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9)

 

큰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우리자신이 보게 된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가 알게 된다. 새로워지는 우리의 오늘이다. 소중과 존중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새로운 마음의 하느님이시다. 온통 기뻐해야 할 시간이 된다. 

만남은 나눔이 되고 나눔은 찬미가 된다. 찬미는 또 다시 만남을 비추어주는 마음이 된다. 복음은 거래가 아닌 참된 만남의 기쁨이다. 만남의 기쁨은 더욱 소중해지는 은총이 된다. 참된 만남으로 감춰진 구원의 신비가 우리에게 환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반겨준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존중으로 들어높여 주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삶의 행복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대림이다. 

하느님을 향한 찬미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비천함과 믿음 사이에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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