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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1.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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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1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사무 9,1-4.17-19; 10,1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 사울이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사무 9,1-4.17-19; 10,1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람, 사울이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2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3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

4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다.

17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18 사울이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견자의 댁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산당으로 올라가시오.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음식을 들고, 내일 아침에 가시오. 그때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다 일러 주겠소.”

10,1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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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2,13-17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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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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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7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안토니오 아빠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8:4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고해성사, 희망의 자리

사제로 살아가며 제가 느끼는 가장 큰 보람 가운데 하나는 고해성사 안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며 눈물 흘리는 교우를 만날 때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자격도 없습니다.”라며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저 자신도 회개해야 하는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 또한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해야 하는 죄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제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저에게 맡겨 주신 사제직의 은총 안에서 가능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라는 주님의 말씀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큰 희망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며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멀리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께 돌아오는 사람에게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회개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사랑의 관계를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고해성사의 참뜻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의 뜻에 맞갖게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이 결심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우리는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가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에 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받아 주십니다. 참된 회개의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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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필요한 사람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에서 인상적인 것은 군중이 모두 주님께 모여 온다는 점입니다. 전에는 이것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번엔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셨는지, 이런 하느님에 비춰 나는 어떤가? 사람들은 즐겨 내게 모여 오는가? 내게 오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

그런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께 모여들게 했을까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에겐 사람들이 오지 않는데 무엇이? 그것은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오는 사람도 밀어냈지만 주님께서는 가리지 않고 다 오라고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쫓아내거나 밀어내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복음 다른 곳에선 이렇게 또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고생하고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런데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셨지만 모든 사람이 주님께 갔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주님께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 주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 주님이 적지 아니 부담스러운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주님 말씀하셔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필요한 사람이 갑니다. 가난한 사람이 갑니다. 이런 뜻에서 영어 표현이 재밌고 의미 있습니다. ‘in need’라는 말에는 가난하다는 뜻과 필요하다는 뜻이 같이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이고,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불러주시는 분의 관계인가요? 이런 묵상을 하다 보니 문득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도 이 노래를 오늘 꼭 들어보시며 오늘 복음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You Needed Me - Anne Murray

I cried a tear, you wiped it dry.
I was confused, you cleared my mind.
I sold my soul, you bought it back for me
And held me up and gave me dignity.
Somehow you needed me.

You gave me strength to stand alone again
To face the world out on my own again.
You put me high upon a pedestal
So high that I can almost see eternity,
you needed me, you needed me;
And I can't believe it's you,
I can't believe it's true.
I needed you and you were there and I'll never leave.
Why should I leave I'd be a fool
'Cause I've finally found someone who really cares.

You held my hand when it was cold.
When I was lost, you took me home.
You gave me hope, when I was at the end,
And turned my lies back into truth again.
You even called me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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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기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전인격을 동반한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을 닮아"(필립 3,10)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당신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는 것”(로마 8,29)이요, "그분의 모습”(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 참조)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2,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저도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겸손의 길: 저는 하느님을 봅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십니다. 그리고 짧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섭니다. 도대체 그 짧은 찰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단순히 목소리가 좋아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눈맞춤(Eye-contact)'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말이 오가기 전, 이미 시선이 영혼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시선'이 어떻게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는지, 그리고 교만이 왜 우리를 숨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프랑스 영화 중에 『마주 보며 웃어(Look at Me)』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죠? 주인공 ‘롤리타’는 뚱뚱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성악 지망생입니다. 그녀에게는 유명 작가인 아버지 ‘에티엔’이 있는데, 이 아버지는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 딸에게 무관심합니다. 딸이 뭘 하든 건성이고, 늘 시계를 보거나 딴청을 피웁니다. 아버지의 시선을 받지 못한 딸은 늘 주눅이 들어 있고, 목소리는 기어들어 갑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롤리타가 합창 공연을 하는 날입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두려움에 떨며 객석을 훑습니다. ‘아빠가 또 딴짓을 하면 어쩌지?’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가 딸을 뚫어지게 응시합니다. 그 눈빛은 비평가의 눈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눈이었습니다.

그 시선과 마주친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롤리타의 표정이 변하더니, 그녀의 입에서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닙니다. “나는 너를 본다. 나는 너를 인정한다.”라는 아버지의 시선이 그녀 안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마태오라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고 바라봐 주신 예수님의 첫 눈맞춤이었습니다. 나의 창조주가 나를 바라봐 주는 행위는 곧 내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되면, 우리는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시각적 절벽(Visual Cliff)’ 실험으로 증명합니다.

갓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기 앞에 투명한 유리를 놓아 낭떠러지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멈춥니다. 이때 건너편에 있는 엄마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 아기는 절대 건너지 않고 웁니다. 하지만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 아기는 그 깊은 낭떠러지 위를 거침없이 기어서 건너갑니다. 엄마의 눈빛이 낭떠러지라는 현실보다 더 강력한 ‘안전지대’가 된 것입니다.

죄인 레위에게 세상은 낭떠러지였습니다. 모두가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으니까요. 하지만 건너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춰주셨기에, 그는 ‘세관’이라는 낡은 안전지대를 버리고 ‘제자’라는 모험의 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황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 주님의 눈을 보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자꾸 이 시선을 피하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지은 죄, 나의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비극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숨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자마자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장소가 궁금해서가 아닙니다. “왜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하느냐?”라는 안타까운 외침입니다.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착각, 그래서 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의사의 눈을 피하는 태도입니다. 숨는 순간, 치유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시선을 피하는 그곳, 관계가 단절된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반면, 겸손은 나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비결은 믿음이었는데, 그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행위’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졌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고 파도(현실)를 본 순간, 그는 중력의 법칙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구원은 시선을 다시 주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의 일화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불같은 성격 탓에 괴로워하며 고행하던 예로니모에게 예수님은 고행이나 번역 원고가 아니라, “네가 아직 주지 않은 것, 너의 죄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로니모가 자신의 치부를 내어놓고 주님과 눈을 맞췄을 때, 그는 비로소 성인이 되었습니다.

유기견 보호소의 강아지들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구석에 숨어 벽만 보거나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에게 시선은 곧 ‘위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봉사자가 끊임없이 사랑을 주면 기적 같은 순간이 옵니다. 강아지가 고개를 돌려 봉사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꼬리를 흔드는 날입니다. 그 눈맞춤의 순간이 바로 치유가 완료된 시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밤을 기억하십니까? 닭이 울었을 때, 성경은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고 전합니다. 그 시선은 비난이 아니라 “나는 다 안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는 연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기에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었고, 다시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유다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등으로 숨어버렸기에 절망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라봄을 견뎌내십시오. 시선을 고정할 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교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중에 “사우보나(Sawubona)”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예보(Yebo), 당신이 나를 보기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것은 “레위야, 사우보나! 내가 너를 본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시선이 투명 인간 같았던 죄인 레위를 사도 마태오로 존재하게 했습니다.

교만은 우리를 숨게 하여 지옥으로 이끌지만, 겸손은 우리를 드러내어 천국으로 이끕니다. 겸손해지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나의 죄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은 어머니가 아기를 보듯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을 바라봅시다. 엄마가 묻혀서 무너지지 않고 지어질 수 있었던 성에서,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는 그 성 안에서는 어디서든 어머니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주 어머니를 바라보려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살아야 교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분의 자비로운 눈동자를 바라봅시다. 믿고 바라보려고만 한다면 그분의 시선과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모든 말씀 묵상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계속된 사업 실패로 모든 의욕이 사라진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이 공원에 놀러 온 젊은 아빠와 어린 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잔디밭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드디어 손 벌리고 있는 아빠가 있는 곳까지 넘어지지 않고 도착했습니다. 환하게 웃는 아빠의 모습, 그리고 성취감에 가득 차 있는 아이의 미소를 보면서 형제님께서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실패가 단순히 실패로 끝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걷기를 배우면서 넘어지는 것을 우리는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전거 배울 때 넘어지는 것 역시 실패가 아닙니다. 수영장에서 멋지게 팔과 발을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도 없이 수영장 물을 마셔야지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실패는 성공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연습입니다.  

단 한 번에 성공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를 너무나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과정, 연습이 필요한 ‘나’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실패가 보이지 않게 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세리는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액수 이상을 착복하여 부를 축적했기에 ‘매국노, 공인된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어떠했을까요? 실패의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희망도 품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레위가 회개한 뒤에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레위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어서, 이를 쓰기 위해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먼저 찾아오셨고, 레위가 아직 회개하지 않았어도 죄인인 상태에서 부르십니다. 희망으로 다가오신 주님께 레위는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어부였던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따랐던 것처럼, 레위는 안정적인 수입원인 세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진정한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은 은총입니다. 진정한 성공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주님 부르심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보통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

 

다른 말씀 묵상도 함께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경계가 그어진 자리에서 식탁을 차리십니다. 사람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그 곁에 먼저 앉으십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사람을 살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가능성을 보십니다.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회복시키는 쪽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올바름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부르심은 조건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가장 낮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평등의 자리입니다. 그 기쁨은 함께 밥을 나누는 생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공동체의 품격은 누구를 내쫓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느냐로 드러납니다.

참된 구원은 혼자 도망치듯 얻는 자유가 아니라, 함께 새 길을 여는 해방입니다. 은총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시작되는 새로운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식탁을 넓혀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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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2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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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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