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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1.1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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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1월 1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49,3.5-6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제2독서
    1코린 1,1-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 복음
    요한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49,3.5-6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께서

3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으로 돌아가기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1코린 1,1-3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오늘 말씀 요약 보기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1,29-34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의 말씀 한 줄 요약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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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8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4:3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세례는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직접 보고 들은 것에서 비롯된 참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따라서 ‘물’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 가운데 물을 붓는 이 예식은, 물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씻어 내는 ‘정화’를 상징함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로써 죄에서 벗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공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도 세상 속에서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활에서 보여 주신 수많은 행위와 기적을 되새기며,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 목록으로 돌아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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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두 가지와 어린 양의 네 가지 의미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울 것’이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 형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언하며, 성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빌어 줍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먼저, ‘첫 번째 증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우리는 오늘도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이름을 다섯 번이나 부릅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야훼 이레”,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에서 보듯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제사에 쓰기 위해 준비한 ‘제물’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7;레위 23,5-6;신명 16,1-7)입니다. 곧 하느님께서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맏자식을 치는 죽음의 재앙을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 문설주에 발라진 ‘희생양’입니다.

<셋째>는 “아자젤”, 곧 대신 죽는 ‘속죄양’으로서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사나운 맹수들이 위협할 때마다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주었고, 가나안에 정착 후에는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제의로 바쳐지면서(매년 7월 10일),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보냈던 “아자젤”, 곧 ‘속죄양’입니다.

<넷째>는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묵시 5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함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신 분”(묵시 5,13 참조)임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옛날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의 죄인들을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을 따르는 우리 역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소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뒤에 오신 분이지만 당신보다 앞서신 분이요, 이미 전에 증언한 분이요,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바로 이 분을 세상에 알려지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다음, ‘두 번째 증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그는 먼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2-33)라고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말하고,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이 존귀하신 분, 곧 아버지의 권능이신 성령으로 도유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생명의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신적 생명이 자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옷 입듯이 입었고(갈라 3,27),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일인지요!! 그러니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활짝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29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삶이기에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이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게!

찬미 예수님.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아주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당시 요르단 강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예수님 위에 내린 성령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가는 청년 예수, 혹은 목수 아들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왜 요한의 눈에만 보였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 안에 이미 성령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뛰놀았지요. 내 안에 있는 것이 밖에서도 보이는 법입니다.

성령이란 무엇일까요?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늘 아주 직관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피’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사랑이며, 희생의 결정체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피를 물려받기에 부모를 알아보고, 부모의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이 ‘피의 알아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레인맨』입니다.

주인공 찰리는 빚에 쪼들리는 자동차 딜러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 자폐증 형 레이먼드를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 합니다. 찰리에게 형은 그저 돈줄이자 짐짝, 말도 안 통하는 고장 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도중, 호텔에서 찰리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자 형 레이먼드가 발작을 일으키며 소리칩니다.

“뜨거운 물은 안 돼! 아기 찰리가 데어! 앗 뜨거, 앗 뜨거!”

찰리는 그 순간 얼어붙습니다. 어릴 적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뜨거운 물에 데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상상 속의 친구 ‘레인맨’이 바로 이 형 레이먼드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형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기억 속에 묻혀있던 나의 수호천사였고, 나를 지켜준 핏줄이었습니다. 찰리가 형의 내면에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피’를 발견한 순간, 그의 눈빛이 변합니다. 이제 형은 이용할 도구가 아니라, 내가 지켜줘야 할 소중한 형제가 됩니다. 형의 웅얼거림은 소음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가 됩니다.

부모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해야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 당신 아버지의 피, 곧 성령을 쏟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옛이야기 중에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농담을 던집니다.

“오늘 대사를 보니 꼭 뚱뚱한 돼지 같소.”

그러자 무학대사는 웃으며 답합니다.

“제 눈에 임금님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이성계가 의아해하자 대사가 말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

내 안에 부처의 마음이 있으면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내 안에 욕심이 가득하면 세상이 돼지우리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피’인 성령이 흐르면, 세상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의 천사도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주인의 피가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분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면,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 이마에 묻은 하느님의 피를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사랑과 피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크라이나의 ‘옥사나 말라야’ 사례를 봅시다. 1991년 발견 당시 8살이었던 옥사나는 알코올 중독자 부모에게 버림받아 3살 때부터 개집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추운 겨울밤, 그녀를 안아준 것은 부모가 아니라 떠돌이 개들이었습니다.

그녀는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짖었고, 혀로 물을 마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시선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의 피(사랑)’를 받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개라고 믿는 존재가 인간의 아기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밥그릇을 두고 싸워야 할 서열 경쟁자로만 봅니다. 인간 본성의 피, 인간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타인에게서 존엄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피인 성령을 수혈받지 못하면, 우리 눈에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경쟁자나 귀찮은 존재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의 피를 받은 이들은 인간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구겨진 지폐도 돈이듯, 죄로 구겨진 인간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 이야기입니다. 어느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영주의 성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의 괴롭힘과 고된 훈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그 화려한 성은 감옥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늙은 시종이 아이를 붙잡고 충격적인 비밀을 말해줍니다.

“이 성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네 어머니가 너를 사무라이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이 성의 기둥 속에 묻히는 ‘인주(人柱)’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이의 눈에 비친 성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차가운 기둥과 벽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뼈요, 어머니의 살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기둥을 부여잡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서린 이곳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다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던 귀족 아이들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내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피가 묻은 성 안에 사는 모든 존재를 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 와서 십자가를 볼 때, 이웃을 볼 때, 그저 나무 조각이나 남으로 보인다면 아직 내 안에 성령의 감각이 무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보려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의해 성령을 많이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간절히 보려고 하는 이들에게 내리십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님이 씻지 않은 노숙자를 껴안았을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냄새나는 거지에게서 예수님의 목마름을 보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피’를 발견하려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데, 그때 오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만 성령을 볼 수 있습니다. 피로만 피를 볼 수 있습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가족을 잃은 고정원 씨가 그 살인마를 양아들로 삼으려 했던 그 피눈물 나는 노력은, 그 괴물 같은 인간 안에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피, 성령이 흐를 때만 가능한 시선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고 기도했기에 성령이 주어졌고,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의 눈’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피, 곧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개 안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죄 안에는 거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성령의 안약을 넣고 세상을 보십시오. 나를 괴롭히는 이웃 안에서, 부족해 보이는 가족 안에서 상처 입은 나의 ‘레인맨’을 발견하십시오. 그들 안에 묻어있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저 사람 안에 하느님의 피가 묻어있음을!”

아멘.

 

오늘의 모든 말씀 묵상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는 집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없애는 예전의 유행이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텔레비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과 같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경기에서나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거실에서 보기 위해 굳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 쟁탈전으로 서로 싸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됩니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졌던 거실은 이제 텅 빈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채널 쟁탈전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는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가 익숙합니다. 친구나 가족보다도 스마트폰이 더 가깝고, 때로는 나의 전부이고 심지어 마치 배우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또 자극적인 것 등을 모두 이 스마트폰에서 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사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쉬운 것,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주님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면 안 되나?’, ‘성체도 그냥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될까?’, ‘굳이 고해소에 들어가 고해성사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등등…. 인격적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얻기 힘들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석에 앉아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기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실 진짜 구원자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귀찮다고, 지루하다고, 힘들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하기보다 피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심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중 두 번째 노래로. 하느님께서 선택된 종의 사명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민족들의 빛’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실수로, 북쪽으로 1도 다르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비행기가 60마일을 날아갈 때 1도가 틀어지면 1마일을 벗어난다는 60:1의 법칙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8,800km, 그래서 148km의 오차가 생깁니다. 인천 기준으로 북쪽 150km이면 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겨울 1도라 해도 목적지가 아예 바뀌게 됩니다.  

우리 삶의 항로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편하고 쉬운 길,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딱 1도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매일 1도쯤 더 기도하고, 매 순간 1도쯤 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이루어지는 1도의 방향 전환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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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자기 내어줌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어린양이십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끝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어린양의 삶이십니다. 어린양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야 할 존재의 방향입니다.

하나를 낮추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사람 사이의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시는 어린양이십니다. 죄를 벌하시기 위해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죄를 없애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신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어린양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과의 일치는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처럼 사랑하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악을 바깥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악을 사랑 안으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과의 일치는 끝까지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삶입니다. 어린양의 겸손은 일치의 근원입니다.

겸손은 일치가 머무를 공간을 만듭니다. 겸손은 사람을 갈라놓지 않고 하나로 묶는 힘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머무름을 통해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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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49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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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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