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오니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35,1-6ㄴ.10)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제 2독서
(야고 5,7-10)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1,2-11)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사 35,1-6ㄴ.10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야고 5,7-10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7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마태 11,2-11
오늘 복음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2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4일
윤병우 미카엘 신부
✚ 올리베따노 수녀회 서울분원 소개 00:20
✚ 미사시작 01:20
✚ 강론시작 11:5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말씀을 기다리는 마음이 가장 큰 기쁨을 만든다.
‘기뻐하여라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마른 땅과 사막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바빌론 유배살이에 지친 백성을 해방과 귀환이라는 큰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수확의 기쁨, 가족과 나누는 식사의 기쁨, 화목한 공동체의 기쁨, 축제의 기쁨 등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보다 더 깊은 기쁨은, 겸손하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때로 의심과 불안에 깎여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실 분”(마태 11,3)이신지 아니신지를 묻자 그분께서는 대답으로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새로운 세상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11,5 참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인 요한에게는 ‘말씀’이신 분과 만나는 것이 곧 자기 존재의 실현이었습니다. 요한은 말씀이 담기지 않은 소리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소리’가 전하고자 한 뜻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오해할 때 자신은 ‘소리’일 뿐임을 밝힙니다.
이제 더욱 가까워진 ‘말씀’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겸손과 진실로 우리 마음의 길을 곧게 닦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로또의 기쁨과 행복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대림 2주일은 ‘회개하라!’ 주일이고, 대림 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대림 2주일 가르침대로 회개하였다면 이제 기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라는 얘기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회개가 세속인의 회개가 아니고 신앙인의 회개라면 세상을 향했던 내가 주님께로 돌아선 것이기에 이제 주님으로 인해 희망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러니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로또의 행복을 예로 들어 오늘 희망과 기쁨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매주 로또를 산다고 제게 얘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에 사느냐 물었더니 자기는 그런 꿈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세속적인 행위가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그러면 왜 사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로또를 사서 부적처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한주의 희망이 생겨서 한주 내내 뿌듯하고 희망을 지니고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또의 행복이 두 가지인데 로또에 당첨돼 기쁜 행복이 하나이고, 로또에 당첨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기쁜 행복이 다른 하나이며, 완료형이 하나이고 미래진행형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당첨된 사람은 엄청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 기쁨과 행복은 당첨된 순간이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불행하게 된답니다.
그 이유를 보면 하나는 그 돈으로 방탕하게 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돈을 욕심내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돈도 건강도 사람도 다 잃기 때문입니다. 저도 군대에서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배가 너무 고프고 늘 고팠으며 집단 허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종이 울리면 친구들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그래서 긴 줄이 생기는데 저는 일부러 늦게 가 맨 뒤에 섭니다. 속으로 먼저 먹으려고 하는 놈들 한심하다고 하며 영적 우월감을 즐기지만 한 꺼풀 속으로 더 들어가면 저만의 희망 연장책이었던 것입니다.
경험으로 볼 때 일찍 먹고 나면 먹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지고 또 먹고 싶습니다. 실제로 먼저 먹은 친구들을 보면 먹고 나서도 또 주변에서 껄떡거립니다. 그걸 아는 저는 맨 뒤에 서서 얼마 안 있으면 먹게 되리란 희망을 오래 즐깁니다. 그때는 100m 뒤에서도 배급하는 곳을 뚫어지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집중합니다. 옆에 꽃이 폈어도 그것 눈에 들어오지 않고 누가 지나가도 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사실 한순간의 기쁨과 즐거움,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한순간일 뿐 더 이상이 없는 기쁨과 즐거움은 오히려 더 허기지게 할 뿐이니 우리는 완료형의 희망과 기쁨보다는 현재진행형의 희망과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희망 고문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확실하고 틀림없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돈도 로또도 성공과 성취도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의 기쁨과 행복을 줄 것은 하느님입니다. 돈과 로또와 성공과 사람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하느님은 다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이고 우리는 그 하느님께 희망을 걸며 기뻐합니다. 이 하느님을 믿습니까? 이 하느님을 사랑합니까? 이 하느님을 희망합시다! 그리고 기뻐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길을 닦는 일
그리움이 길이 된다 (박노해)
나는 기다리는 사람 / 그리움을 좋아한다. //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
기다림이 지켜간다. / 그리움이 걸어간다. //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 눈물 나는 내 사랑은 /
그리움이 가득하여 /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
기다림이 걸어간다. / 그리움이 길이 된다. //
대림이 깊어가고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가면서 빛이 다가옵니다.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의혹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29 참조)라고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일입니다. 그러면 살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은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이 “오실 분”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면, ‘뒷부분’은 ‘먼저 오게 될 사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나 이 증언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증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임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10)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길”을 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길을 마련하시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길이 우리 마음 안에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길을 닦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침없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길을 곧게 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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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의 실행을 통해
“오실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듯이
제가 하는 일을 보고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소서.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276대의 자동차와 감사 일기
2004년 9월 13일, '오프라 윈프리 쇼'의 방청석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차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쇼의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외쳤습니다.
"여러분 의자 밑을 보세요! 상자가 있을 겁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세요. 열쇠가 들어 있는 사람이 바로 새 차의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방청석에 앉은 모든 사람의 상자에 차 열쇠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스튜디오는 비명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오프라 윈프리는 눈물을 흘리며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모두에게 차를 드립니다! (Everybody gets a car!)"
사람들은 그녀를 '성공한 여자', '기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처음부터 이토록 빛나고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과 학대 속에 자랐고, 14세에 미혼모가 되어 아기를 잃었으며, 마약에 손을 대어 감옥에 갈 뻔했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고,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녀를 지옥에서 건져 올린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감사 일기'라는 작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 감사한 것 5가지를 찾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고통스러워도, 잠들기 직전 5분 동안만큼은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하기로 '착한 뜻'을 세웠습니다. 그 짧은 5분의 평화를 얻기 위해, 그녀는 낮 동안의 모욕을 참아내고, 유혹을 이겨내고, 긍정적인 것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착한 뜻'이 그녀를 마약과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려, 세상을 돕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순간의 쾌락 vs 마지막의 평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 언제 가장 기분이 좋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 행복을 찾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찾는 것이 '지혜'이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찾는 행복의 방법이 '지식'입니다.
지혜는 지금의 광야와 미래의 부활을 말하지만, 지식은 지금의 즐거움과 이후의 공허함이나 죄책감을 낳습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의 행복에 주안점을 두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복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의 에사우를 보십시오.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의 코끝을 찌른 것은 붉은 팥죽의 냄새였습니다. 배고픔에 눈이 먼 그의 '지식'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지금 당장 배를 채우는 게 행복이야. 미래의 축복 따위는 지금의 허기를 달래주지 않아."
그는 동생 야곱에게 외칩니다.
"형, 나 배고파 죽겠어. 그 맏아들 권리가 지금 당장 무슨 소용이야?"
결국 그는 찰나의 포만감을 위해 가문의 영원한 축복인 장자권을 팔아넘깁니다. 그가 팥죽 그릇을 비우고 난 뒤 남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배부름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평생을 두고 흘려야 할 통곡의 눈물만이 남았습니다. 지금의 만족이 미래의 축복을 삼켜버린 비극입니다.
손끝의 말초적인 쾌락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정작 생명의 중심인 심장은 무감각해지고 평화를 잃게 됩니다. 대문호 헤밍웨이를 보십시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쓴다"는 철칙을 지키며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침형 인간이었고 성공한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끝, 즉 저녁의 평화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명예와 돈은 그에게 내면의 평화를 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세기의 연인 마릴린 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화려한 스타가 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전 세계가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잠들기 전의 평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약물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공허함 속에 36세의 나이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과정의 행복과 성공은 추구하였지만, 결말의 기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아침에는 바위를 밀어 올리려 애쓰지만, 저녁에는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절망하는 삶이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사일기라기보다는, 그 감사를 잠들기 전에 매일 쓰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지혜를 찾는 자는 광야로 나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마태 11,7-8).
사람들이 안락한 도시를 떠나 거친 광야로 나간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들은 고생을 사서 하며 광야로 나갔을까요? 그들 안에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이 있다"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을 의심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난 이들이 ‘마지막’에 치유되고 되살아난다는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은 끝에 주어집니다. 메시아를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끝을 중요시 여기는 이들만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손끝이 아닌 심장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손끝의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심장의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손끝은 닿는 순간 짜릿하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심장의 평화는 영혼 깊숙이 남아 우리를 지탱합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 주는 평화입니다. 하루를 죄짓지 않고 사랑하며 잘 살았을 때, 잠자리에 누워 느끼는 "아,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뿌듯함, 그것이 바로 심장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평생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고 험난한 광야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다 이루었다."(요한 19,30).
그 짧은 한마디 속에 담긴 평화와 안도감, 그리고 아버지께 대한 뿌듯함. 예수님은 바로 이 마지막 순간의 승리를 위해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지혜를 가진 이의 삶입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사는 사람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에 결정됩니다.
로마의 한 야심만만한 법대생이 필립보 네리 신부님을 찾아와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제 법학 박사가 될 겁니다!"
신부님은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축하하네. 그다음은? (E poi?)"
"그다음엔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명성을 떨쳐야죠."
"좋지. 그다음은?"
"돈을 많이 벌어 편안한 노후를 즐길 겁니다."
"그렇군. 그다음은?"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뭐... 언젠가는 죽겠지요."
신부님은 청년의 눈을 꿰뚫어 보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청년은 그 마지막 질문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 멈춰 섰습니다. 지금 당장의 성공 사다리 끝에 무엇이 있는지, 심판과 영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지식'의 길을 버리고 '지혜'의 길을 선택하여 훗날 사제가 되었습니다.
복음 속 시메온과 안나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평생을 성전에서 단식하고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늙고 지친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은 순간, 시메온은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소원을 이루고, 세상 그 누구보다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은 언제 기분이 좋기를 원하십니까? 순간의 쾌락을 좇다가 밤마다 불안과 허무함에 시달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낮 동안 땀 흘려 사랑하고 광야의 고통을 견딘 후, 밤에는 "다 이루었다"는 평화 속에 잠드시겠습니까?
잠들기 전 5분, 하느님과 단둘이 만나는 그 시간을 여러분 인생의 클라이맥스로 만드십시오. 그 5분을 위해 하루를 산다면, 여러분은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광야로 나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상의 모든 ‘미인’의 가장 아름다운 눈, 코, 입 등을 조합해서 하나의 얼굴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이런 시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는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가장 완벽한 미인’이라기보다는 다소 평범하거나 ‘평균적인’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가진 개성 있고 독특한 매력들이 서로 중화되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종합은 어떨까요? 지혜, 자비, 용기, 예술적 재능, 유머 감각, 따뜻한 인품 등 내면의 모든 장점을 포함한다면 어떨까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으며, 흠잡을 데 없는 인격과 지성을 갖춘 존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은 인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사람이지만 가까이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부족한 단점들이 ‘나’ 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진짜 나만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세상에 발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모든 장점의 집합체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장단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자기가 원하는 방식,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 실망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요한도 마찬가지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습니다. 오실 분은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 메사아의 모습을 세례자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라고 말하면서, 심판의 메시아 상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습은 사랑의 메시아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나열하십니다(이사야 35장, 61장의 메시아적 표징). 사랑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 상과 다르다고 해서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의 표징은 ‘파괴’가 아닌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곳을 낫게 하고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취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더 은총과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주님의 뜻에 반대하면 살면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는 자기 연민을 버리고, 삶을 직면하는 것이다(앙리프레데릭 아미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물음은 이미 어떤 의미를 향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멈추지 않는 우리의 물음이며 우리의 사랑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물음과 사랑을 정화합니다. 기다림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선택입니다. 자선은 우리의 기다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자선은 인간 존엄을 회복시키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난함 안으로 먼저 내려오십니다. 이렇듯 자선은 사랑의 방식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자선은 기쁨을 혼자의 소유가 아니라 함께 누리는 현실로 만듭니다. 기쁨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태어납니다. 우리의 의심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기쁘게 일하고 계십니다. 의심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는 용기입니다.
기쁨과 자선은 나를 넘어설 때 깊어집니다. 자선은 우리 물음에 가장 정직한 응답입니다. 기다림은 기쁨을 담을 그릇을 넓히는 시간이며, 기쁨을 선물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물음은 사랑으로 자라고, 자선은 기다림을 견디게 하며, 기다림은 기쁨으로 완성됩니다. 오늘의 물음이 자선이 되고, 오늘의 기다림이 기쁨이 됩니다.
마태오복음 11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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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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