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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15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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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어주시고 저희를 찾아오시는 성자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의 어둠을 비추어 주소서. 아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1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24,2-7.15-17)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 오늘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민수 24,2-7.15-17
오늘 제1독서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21,23-27
오늘 복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5일
한용민 그레고리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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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닫힌 마음의 대가

오늘 복음의 바로 앞부분은(마태 21,18-22 참조) 예수님께서 성안으로 들어가시다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말라 버리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시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분께 시비를 겁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에도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께 질투를 느끼고 화가 난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시 잘 알려진 토론 방식으로 대응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1,24-25)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나 올바른 대답에는 관심이 없으며,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기들의 권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리하게 대답한다고 생각하였겠지만, 사실은 예수님과 한 토론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만일 나에게 작은 권한이라도 주어지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씁니까? 다른 이를 섬기는 데 씁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통제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씁니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모습은 어쩌면 마음을 되돌리고 변화하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신념과 욕구, 닫힌 마음과 굳어진 습관들에 갇힌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내적 자유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자기 신념과 욕구를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오늘 독서와 복음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묵상케 합니다. 발라암의 예언은 어디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어디에서? 그리고 내 생각은 어디에서? 내 생각이니 나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느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인가? 오늘 독서 민수기에서 발라암의 예언은 신기합니다.

그는 이민족의 예언자인데다가 역시 이방인의 왕인 모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받았는데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먼 훗날 잘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은 그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 전하는 신탁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말을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냐 하면,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쓰러짐’과 ‘눈뜨임’이라는 역동이 있는데,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엎어짐과 새롭게 눈 뜸을 연상케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하려고 했는데 엎어짐과 함께 눈이 멀었다가 새로운 눈이 열리면서 증언자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의 인간적인 생각이 뒤집히고 새로운 눈이 열린 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고 그가 한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도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기 위해서는 쓰러지고 엎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인생길에서 뜻하지 않게 쓰러지고 엎어지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뜻이 아니니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 나의 하느님은 나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분이시며, 눈과 입이 닫히게도 하시고 열리게도 하시는 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기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 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의 무게를 재며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은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기 자신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이는 가려진 자기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저울 위에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져보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1,2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 위에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두렵습니까? 그럼 껴안아 보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득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했던 유명한, 어쩌면 아주 건방져 보이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얼핏 들으면 고객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무지하니까 내가 주는 대로 써!" 이런 느낌이지요. 하지만 잡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고객을 무시한 게 아니라, 고객보다 더 치열하게 고객의 삶을 연구하고 파고들었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두려워서 묻습니다. "고객님, 이거 좋아하세요? 싫어하세요?" 거절당할까 봐, 안 팔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봅니다. 하지만 잡스는 수천 번의 고민과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까지 이미 다 꿰뚫고 있었습니다. 상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두려움이 사라진 경지, 그래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실현하려면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혹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용기를 줍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구리와 통나무' 이야기 아시지요? 어느 날 연못에 큰 통나무가 '첨벙!'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 엄청난 소리와 물보라에 개구리들은 혼비백산하여 물속 깊은 곳으로 숨었습니다. "아이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다!" 개구리들은 벌벌 떨며 감히 쳐다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그런데 용기 있는 개구리 한 마리가 슬금슬금 물 위로 올라와 그 괴물을 툭 건드려 보았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그냥 떠 있는 나무토막일 뿐이었습니다. 실체를 알고 나니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중에는 개구리들이 그 통나무 위에 올라가 일광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통나무는 세상이고 참다원 권위는 그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니 통나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던진 분을 덜 믿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키워가는 방법은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가는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통나무를 무서워하는 개구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그들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안 믿었냐고 할 거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이 돌을 던질 텐데…'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했습니다. 왜일까요? 지아 장처럼 군중 속으로 들어가 부딪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군중의 소리보다 하느님의 소리가 더 크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세상이 거대해 보이고, 하느님은 작아 보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 13장을 보면 이 대비가 더 명확해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돌아온 10명은 사색이 되어 보고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 같았습니다!"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비하하는 이 패배감.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부재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없으니, 눈앞의 거인만 보이고 내 뒤의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칼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 저 거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 앞에서 떨지 않았던 것은, 그가 돌팔매질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너는 칼과 창을 들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나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니 하느님의 크기에 비추어 아주 작게 이해할 수 있는 힘입니다.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 부인은 당시 사람들이 미지의 물질인 라듐을 두려워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이해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지금은 더 많이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덜 두려워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두려움을 없애고 믿음을 키울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유명한 '뱀 공포증 치료 실험'이 그 힌트를 줍니다. 반두라는 뱀을 보면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뱀을 던져준 게 아닙니다. 첫 단계는 유리창 너머로 뱀을 보게 합니다. 괜찮으면 다음 단계, 문을 열고 봅니다. 그 다음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뱀 꼬리를 살짝 만져봅니다. 이 과정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진행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놀랍게도 참가자들이 맨손으로 뱀을 만지며 목에 두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생각보다 부드럽네요." 

이 실험의 핵심은 '작은 직면(Small Steps)'입니다. 두려움을 쪼개서 조금씩 맛보면, 우리 뇌는 "어라? 안전하네?"라고 학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뱀뿐만 아니라 인생의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반두라의 실험처럼, 매일 조금씩 하느님께 나를 던져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은 가만히 앉아서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스티브 잡스처럼 고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마리 퀴리처럼 위험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고, 다윗처럼 물맷돌 하나 들고 거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작은 체험들이 쌓여 우리의 믿음은 거대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면 피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빽 믿고 딱 한 걸음만, 유리창 너머로 뱀을 보듯 다가가 보십시오. 그림자를 피하면 괴물이 되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주님과 만나는 성소가 됩니다. 아멘. 
.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2020년부터 시작되었던 코로나 팬데믹은 많은 이를 힘들게 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거리두기로 인해 미사 참석이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에 나가지 못하니 아예 신앙을 멈춰버린 분도 많았습니다. 요즘도 코로나 때부터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가 이제야 나오게 되었다는 분도 꽤 됩니다. 쉬는 김에 오랫동안 푹 쉬신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박해 시대에도 전염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821년, 우리나라는 콜레라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콜레라는 ‘괴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괴상한 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었습니다. 특히 병의 진행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아침에 멀쩡하던 사람이 저녁에 죽어 나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병 후 사망에 이르는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그래서 1821년에만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신앙생활을 멈췄을까요? 더구나 박해의 위협도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서 질병에 맞섰고, 박해에 굴하지 않고 순교하셨습니다. 이런 우리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신앙과 지금 우리의 신앙을 비교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너무 쉽게 세상에 타협하던 것이 아닐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교 체제에서 공적인 가르침이나 성전 관할권은 랍비의 안수나 산헤드린의 위임이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받지 않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려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라고 되물으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한 예언자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왔다.”라고 하면, 왜 요한의 말을 믿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그가 증언한 예수를 왜 믿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면, 요한을 참된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의 폭동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진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을 회피하는 것이고,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불성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아들의 권한을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처럼 남의 눈치를 보며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가 아닐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바늘 하나로 천을 잇듯, 우리는 서로의 삶을 이어간다(마야 안젤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참된 권위는 사랑과 진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 삶 그 자체입니다. 참된 권한은 힘을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권한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권한은 생명을 보호하는 힘입니다.

권한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항상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자기중심적 자아에서 나오지 않고, 하느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된 자기 비움의 상태에서 나타납니다. 

이렇듯 권한은 얻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설명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체험되는 진실입니다. 높은 자리에 서는 권위가 아니라,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심에서 나오는 권한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명령과 강요로 나타나지 않고,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참된 권한은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옳다고 믿는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일치한 삶으로부터 나오는 권한이 참된 권한입니다. 

 

 

 

민수기 24장 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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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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