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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1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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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 즐거워하여라. 땅아, 기뻐하여라. 우리 주님이 오시어, 가련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1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7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49.1-2.8-10)
    왕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 오늘 복음
    (마태 1,1-17)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창세 49.1-2.8-10
오늘 제1독서

왕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그 무렵 

1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는 모여들 오너라.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라. 

2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 와 들어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라. 

8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네 손은 원수들의 목을 잡고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9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10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1-17
오늘 복음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7일
한용민 그레고리오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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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지루한 족보가 들려주는 놀라운 복음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림 시기 둘째 부분(12월 17-24일)의 복음은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사건들을 들려줍니다. 첫날인 오늘 복음은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르하브암’이나 ‘스알티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이름의 목록이 아닙니다. 유다인인 마태오 복음사가는 셈족 문화에 속하는 이런 가계 소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는 ‘구원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를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밝고 어두운 면을 다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계에는 특별하고 훌륭한 사람들만 있지 않고, 간음한 자, 창녀, 이방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구체적 삶 속에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면서 황제나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작고 약한 한 민족의 역사 안으로, 나자렛 시골 마을 가난한 젊은 부부의 삶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고, 심지어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의 역사,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오늘 그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초월적인 하느님이 내재적인 하느님으로 우리 안에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의외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잘못 사랑하다가 결과적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초월하여 너를 사랑할 줄 알 때 진정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너를 사랑할지라도 너만을 사랑하면 너를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연인들이 사랑할 때 너만을 사랑한다고 사랑 고백을 하는데 물론 그래야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너만 사랑하는 동시에 너만 사랑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너를 초월할 수 있는데도 너만 사랑해야 진정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자기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인 것처럼 너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참사랑이 되려면 어디에 갇혀선 안 되고, 나든 너든 우리나라든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도 봐야 합니다.

저는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기에 즈카르야 노래를 바칠 때마다 어느 정도 거부감이 아직 있습니다. “주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찌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십니까?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라면 천부당만부당입니다.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나 오늘 마태오복음의 족보 이야기는 초월적인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으로 곧 내재적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장소가 왜 우리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냐? 그 족보가 왜 저의 안동 김가 족보가 아니라 다윗 가문의 족보냐? 따지는 것은 인간적인 시비이지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와 신비에 대한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초월적인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내재적인 하느님과 내재적인 사랑이 되려면 어딘가 또 누구에겐가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것은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 안으로 오시고 주님을 제가 제 안에 모셨다고 누가 하느님께 시비하고 저를 시기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제게만 오셨다면 왜 자기에게는 오시지 않고 제게만 오셨냐고 주님께 따질 수 있고 저를 시기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도 가셨다면 주님께 시비해서는 안 되고 저를 시기해서도 안 되겠지요.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고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차별 없이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들어오신다는 것이며,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도 하느님이 그렇게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 안에 새겨진 자비의 얼굴

성탄이 임박해 옵니다. ‘대림 두 번째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때가 차면 그분은 분명 오시겠지만, 그분이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는 기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준비해 두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차려야 할 때입니다. 마음의 간절함으로 “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 라고 마음을 모아 노래할 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본기도>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미사 중, <예물준비기도>를 바칠 때 사제가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부으며 혼자 드리는 “이 물과 술이 하나가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과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의 강생을 예고하고, <복음>에서는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분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보여주듯이 시간보다 앞서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지만, 동시에 육에 따라 본다면 이 족보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 ‘인성의 계보’를 밝혀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과 <본기도>에서 밝히듯이,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하여,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봅니다. 곧 그들 모두가 자비의 사슬로 엮어졌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하느님의 감실을 봅니다. 곧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담겨 있는 성합들임을 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당신 자비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족보를 들을 때면, ‘성모님의 찬가’가 떠오릅니다. 

“주님께서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0).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약속하신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카 1,54-5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대대로 이어지고 영원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계시고 또한 제 안에 자비로 살아계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태가 성숙하면 신랑이 나타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영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2021년에 개봉한 '팔머(Palmer)'라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에디 팔머는 고교 시절 풋볼 스타였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다녀온 전과자입니다. 그가 출소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차가운 감옥보다 더 혹독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거절당하는 일자리... 그는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버티는 '희망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불청객이 하나 끼어듭니다. 옆집에 사는 소년 '샘'입니다. 마약 중독자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버린 후 홀로 남겨진 아이였지요. 그런데 이 샘이라는 녀석이 좀 독특합니다. 남자아이인데 공주 인형을 좋아하고 머리에 예쁜 꽃핀을 꽂고 다닙니다. 세상은 그런 샘을 '별종'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습니다. 

팔머는 처음엔 귀찮았습니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처지에 웬 혹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갈 곳 없는 샘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밥을 먹이고 재워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팔머에게 아주 '불편한 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느 날 샘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팔머는 샘의 담임 선생님인 '매기'를 찾아갑니다. 

"선생님, 애들이 샘을 놀려요. 샘은 그냥... 샘일 뿐인데요."

매기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거친 전과자인 줄만 알았던 팔머의 눈에서, 한 아이를 지키려는 간절한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핼러윈 파티 날이었습니다. 샘이 기어코 공주 복장을 하고 파티에 가고 싶어 하자, 팔머는 자신의 남은 자존심을 다 버립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감수하고 샘의 손을 잡고 파티장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갑니다. 그 순간, 늘 겁에 질려 있던 샘은 당당한 '사랑받는 아이'로 다시 태어납니다. 팔머가 세상의 편견을 막아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샘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팔머의 모습을 보며, 매기 선생님의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그녀는 팔머의 과거(전과자)가 아니라, 현재의 사랑(희생)을 보았습니다. 매기는 팔머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에디."

평생 "실패자", "범죄자"라는 소리만 듣던 팔머에게, 매기의 사랑은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만약 팔머가 샘을 귀찮다고 쫓아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여전히 외톨이 전과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샘이라는 작은 생명을 품고 살려내자, 그 보상처럼 '매기'라는 사랑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팔머에게 매기 선생님은 곧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우리가 껄끄러운 이웃(샘)을 순종으로 받아들여 그를 살려낼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매기)과 사랑에 빠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은 자에게만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주 길게 나열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남자가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족보의 끝에서 문법이 바뀝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라고 수동태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구원의 역사는 내가 무언가를 쟁취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나를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누군가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적 모태가 되어줄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순종할 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이웃을 순종으로 섬길 때, 그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마니피캇’으로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성경 속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보십시오. 천사의 예고를 들은 마리아는 곧바로 늙은 친척 엘리사벳을 도우러 산골로 달려갑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이자 봉사였습니다. 마리아가 도착해서 인사를 건네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엘리사벳 태중의 아이(세례자 요한)가 기뻐 뛰놀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찹니다. 마리아의 방문(순종)이 엘리사벳 모자를 영적으로 깨운 것입니다. 일종의 영적 출산이지요. 엘리사벳 역시 태중의 요한을 하느님의 뜻대로 품어 기르고 있었기에, 성모님을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단번에 알아보고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은 이런 식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막연히 기다리는 자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영화 속 팔머가 샘을 받아들였을 때 매기를 만났듯이, 우리가 누군가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주님께서 그에게 황당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가서 사울이라는 자에게 안수를 주어라." 

사울이 누구입니까? 신자들을 잡아죽이던 공포의 대상, 원수였습니다. 하나니아스는 두려웠지만 "가라, 그는 나의 그릇이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찾아갑니다. 하나니아스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사울 형제"라고 불렀을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그가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니아스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의 눈병을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탄생하는 하느님의 역사를 목격했고, 그 현장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바오로는 없었을 것이고, 하나니아스의 하느님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할 '사울'은 누구입니까? 내 고집을 꺾고 불편한 이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기 죽지 않도록 팔머처럼 손을 잡아주십시오. 여러분의 순종으로 누군가가 웃게 되고, 누군가가 신앙의 눈을 뜨게 될 때, 바로 그 자리에 성탄의 예수님께서 와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가 다시 태어날 따뜻한 구유가 되어줄 때, 그를 태어나게 하시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지 않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일이라는 것에 너무나 뜻밖의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상황도, 고통과 시련의 상황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이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즉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바뀌면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긍정의 이야기로 바꾸는 사람과 기쁨도 부정의 이야기로 바꾸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까요? 실제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지만, 이 시간 안에서 주님의 섭리를 발견한다면서 감사함을 표시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좋은 일이 생겼지만,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면서 불평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의 삶이 더 풍요롭겠습니까? 
 
자기만의 이야기를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를 남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식의 말입니다. 그때 꽤 많은 사람이 이를 수용하고 남의 이야기에 끌려갑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힘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잘 만들고 계십니까? 
 
오늘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지는 기간을 전례적으로 ‘대림 시기 제2부’라고 부릅니다. 16일까지인 ‘대림 시기 제1부’에서는 세상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을 가리는 성격이 강했다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시기 제2부’는 예수님 탄생(성탄)을 직접적으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 첫날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이 ‘족보’를 지루한 이름의 나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의인만 있지 않습니다. 죄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으며, 소외된 자들까지 있습니다. 이들 모두 품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느님은 인간의 실패와 죄악이 가득한 역사 안에서도 당신의 구원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셨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역사의 정점이자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의 역사를 가집니다. 부정의 역사도 긍정의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역사가 자기를 만들어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의 사랑이 자기 역사 안에서 얼마나 넘쳐흐르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잘 만들어야 합니다. 삶에 관한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면서 꿈의 항해를 계속해 나간다면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항해에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이용덕).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족보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깊은 울림입니다. 상처 입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뜨겁게 일하십니다. 이렇듯 구원은 우리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죄와 상처까지도 껴안으시며 우리에게 오십니다.

역사의 왜곡과 실패를 우회하지 않고, 그것을 통과함으로써 구원은 완성됩니다. 불완전함은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역사를 결코 삭제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역사도 은총의 훌륭한 통로가 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족보는 상처 입은 역사 안으로 끝까지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 삶 한가운데에서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하느님 사랑의 역사입니다.

 

 

 

마태오복음 1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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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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