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주님이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리니, 그날에는 큰 빛이 비치리라.
하느님,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으로 지으신 저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성자께서 오실 때에 저희의 온갖 죄악을 씻어 주소서. 아멘.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스바 3,1-2.9-13)
구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 오늘 복음
(마태 21,28-32)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스바 3,1-2.9-13
오늘 제1독서
구세주의 구원이 가난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1 “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2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구나.
9 그때에 나는 민족들의 입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리라.
10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
11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때에는 내가 네 가운데에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 그러면 네가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교만을 부리지 않으리라.
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마태 21,28-32
오늘 복음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6일
윤호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5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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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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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생각을 바꿀 용기, 그곳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그리 호감을 느끼는 청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그분께 시비를 걸기가 일쑤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깨우쳐 주시고자 두 아들의 비유로 그들의 가면을 벗겨 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이 이야기 속의 두 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두 부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길을 잃었지만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바꾸어”(21,29)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곧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말로는 신앙을 과시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21,32)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 사도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물론 “예.”라고 말하고 실천도 하면 가장 좋겠지요. 그런데 늘 그러지는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일상에서 때때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기도할 때, 맡은 일을 할 때, 남을 위하여 양보하거나 희생해야 할 때 ‘아니오.’와 ‘예.’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전환점은 “생각을 바꾸어”(마태 21,29)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의 거절이 아니라 마지막 선택을 보십니다. ‘아니오.’에 끌릴 때 생각을 바꾸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각이 바뀌지 않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을 듣고 나는 맏아들일까? 작은아들일까? 여러분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실 겁니다. 그리고 저도 제가 어떤 아들일까 돌아보려고 합니다. 만약 이 말씀을 듣고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작은아들처럼 건성으로 듣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바로 스스로 증명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난 어떤 사람일까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묻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책입니다. ‘예’하고는 실천하지 않은 작은아들과 ‘싫다’ 하고는 실천한 맏아들 가운데 실제로 실천한 것은 누구냐는 질문에 그 쉬운 답 모를 사람이 어딨습니까?
다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쉬운 질문을 주님께서 왜 하시는 겁니까? 잘도 알면서 너희는 왜 실천치 않느냐 질책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질책에 그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고, 자기들이 실천치 않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펄쩍 뛸 것이며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그들이 생각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 주님 말씀의 기준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이 기준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고 물으셨고, 오늘은 요한의 가르침을 얘기하며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결국 이런 말씀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생각을 바꾸고 믿은 사람이고, 그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은 사람이며 결국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이고, 끝부분에서는 “너희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무엇을 듣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은 사람입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는데도 고리타분한 생각을 바꾸지 않은 사람이며 그것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어에 라틴말에서 비롯된 ‘Status Quo Bias’란 말이 있습니다. Bias 곧 편견 또는 편향이 있는데 현상을 유지하려는 편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현상 유지 편향이 있고 보통 나이 먹은 사람이 젊은이보다 더 많은 편입니다.
그렇지요. 젊은 사람은 비교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잘 받아들이는 데 비해 나이 든 사람은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익숙해서 편하고, 반대로 새로운 것은 불편하고 그래서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편향이나 경향을 넘어서 가치 판단이나 믿음까지 더해지면 곧 내 생각이 옳다거나 옛것이 더 좋다거나 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구약(舊約)이 가고 신약(新約)이 왔는데도 구약이 좋다고 하면 안 되겠지요. 신약(新藥)이 나왔는데 그걸 모르고 구약(舊藥)을 계속 쓰면 늙다리 의사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오고 더 나아가 하늘나라까지 올 것이라고, 세례자 요한이 가르치는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면 안 되겠지요. 어쨌거나 나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 구닭다리 인간,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인간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권한에 대해 논쟁을 마감하신 후에 세 개의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세 비유에는 모두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나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예’라고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실천한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그가 진정 믿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사실, 시나이 계약체결을 약속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라 약속하셨고, 십계명을 주실 때도 “이스라엘아, 내가 오늘 너희에게 똑똑히 일러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들어라! 너희는 그것들을 배우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신명 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약을 체결할 때, 모세가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와 계약의 책을 읽어 들려주었을 때도, 한목소리로 응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탈출 24,3 참조)
그러나 그들은 대답만 하고, 이를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에서 대답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을, 그리고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실천한 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을 바꾸었느냐? 바꾸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생각이 누구를 지향하여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바꾸더라도 혹은 바꾸지 않더라도 그 생각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지향하여 있느냐?’의 문제임과 동시에, ‘그 뜻에 순명하여 실천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따르셨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입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버지께 응답하여 성당(수도원)이라는 포도밭에 와 있어도 ‘아버지의 뜻’을 순명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의 뜻에 ‘예’라고 응답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물으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1,31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 없이 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
찬미 예수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세르기 신부』에는 아주 충격적인 반전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 세르기는 본래 전도유망한 귀족 청교도였는데, 약혼녀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고 수도자가 됩니다. 그는 엄청난 고행과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습니다. 수많은 순례자가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지요. 겉으로 보기에 그는 완벽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욕과 명예욕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의 명성 때문에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타락하고 수도원을 도망칩니다. 갈 곳 잃은 그가 찾아간 곳은 어릴 적 친구였던 '파센카'였습니다.
파센카는 아주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녀는 병든 남편과 까다로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가족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쭈글쭈글한 손을 보며 세르기는 무릎을 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오직 내 이름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척했을 뿐이다. 하지만 파센카, 너야말로 하느님과 깊이 연결된 채 진짜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었구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아주 쓴소리를 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이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꾸중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명(Mission)'과 '에너지(Energy)'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자 요한을 '회개를 외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명'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너는 저 길로 가야 한다"라고 목적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지요.
유다 지도자들도, 세리와 창녀들도 모두 요한을 만났습니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사명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공부해라"라고 사명을 주었다면, 그다음엔 무엇을 줘야 합니까? 네, "밥"을 줘야 합니다. 밥을 먹여야 공부할 힘이 생기니까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일하러 가라"는 사명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을 해낼 '성령의 에너지'를 주십니다. 수석 사제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직함도 있었고, 지식도 있었고, 성전이라는 일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즉, '주유'를 하지 않은 채 자기 힘으로 엑셀만 밟아댄 것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은 화려한 고급 세단인데, 엔진은 꺼져 있는 상태였던 겁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명령(사명)을 듣자마자 깨달았습니다. "아, 내 힘으로는 저렇게 살 수 없구나. 내 연료통은 텅 비었구나."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사명을 수행할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지금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냉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 없이 내 힘으로 하고 있는 그 일은, 사명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사명이라는 이름표만 달고 실제로는 내 욕심을 채우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심해 잠수부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깊은 바닷속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는 사명을 띤 잠수부가 있습니다. 수압이 엄청난 그곳에서 잠수부가 살아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물 위 배와 연결된 가느다란 '산소 호스'뿐입니다. 잠수부가 "나 이제 일하는 요령 좀 알았어. 이 호스는 거추장스러우니까 끊고 내 마음대로 할래!"라며 호스를 자르는 순간, 그는 사명은커녕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심해에서 하느님의 일(보물)을 하려면,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산소, 즉 성령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공물(Tribute)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마셔야 하는 산소입니다.
교회 역사를 빛낸 위대한 성인들은 하나같이 이 '산소 호스'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에 들어간 후 초기 20년 동안을 '평범한 수녀'로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수도자라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기도 시간보다 손님 접견실에서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훗날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것은 하느님도 즐기려 하고 세상도 즐기려 했던 비참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헛발질만 했습니다."
그녀가 '에체 호모(Ecce Homo)', 즉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의 상 앞에서 눈물로 회심하고 '기도의 성'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녀의 진짜 사명이 시작되었습니다.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사명은 '가장 비참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체력으로는 불가능한 중노동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고름이 흐르는 환자를 닦아주는 수녀님을 보고 코를 막으며 물었습니다.
"수녀님, 저는 백만 불을 줘도 이 짓은 못 하겠습니다. 어떻게 견디십니까?"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기자 양반, 저도 못 합니다. 백만 불을 줘도 안 합니다. 제 힘으로는 단 1시간도 못 버팁니다."
그녀는 매일 새벽, 미사와 성체조배를 하지 않고는 절대 빈민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제 생명줄입니다. 주유하지 않으면 저는 멈춰버린 낡은 차일 뿐입니다."
아시아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또 어떻습니까? 인도와 일본, 중국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대한 사명 앞에서, 그는 하루에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느라 팔이 마비되어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풍토병에 시달리는 극한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밤마다 감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더 이상은 못 합니다. 제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는 동료에게 쓴 편지에서 "내 육체의 힘이 다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힘이 내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늘 하루, 일터로 나가시기 전에, 설거지를 시작하시기 전에 단 1분이라도 '산소 호스'를 점검하십시오.
"주님, 요한이 알려준 사명을 감당하려 합니다. 하지만 제겐 힘이 없습니다. 당신의 에너지를 채워주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행하는 일은 위험한 질주입니다. 하지만 기도로 에너지를 채우고 나가는 그 길은, 세리와 창녀들처럼 가장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조급한 거 없어.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 네 나이가 얼마나 어린지 알게 될 거야. 뭐든 도전해 볼 수 있는 나이지. 그래야 하고….”
소설책을 읽다가 보게 된 구절입니다. 머리를 꽝 때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 지금 우리는 남아 있는 시간 중에서 가장 젊은 나이를 살고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정말로 조급해했던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10대에도, 20대에도, 신부가 되었던 3~40대에도 있었습니다. 50대 후반으로 달려가는 지금에 와서 그때를 되돌아보니 모두 어릴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7~80대의 나이가 되어 지금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얼라가 뭘 안다고 그렇게 설쳤어?”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조급함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쓸데없는 다른 것만 하게끔 나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여유 안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돈, 명예, 사람들의 인정…. 이런 세속적인 것의 가치는 그 시간 안에서만 잠시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영원함을 기억하며 지금 해야 할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과 보호 아래 여유를 느끼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했지만 가지 않지요.
맏아들은 처음에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표시했지만, 자기의 뜻을 꺾고 방향을 돌리게 되지요. 바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살았거나 공개적인 죄인으로 살았지만, 훗날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알고 준수한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라는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종교관에서 가장 불결하고 죄인 취급받던 이들이 가장 거룩하다는 사제들보다 앞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히 말로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생각을 바꾸는 회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말로만 고백할 때가 참 많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바치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겠습니다.” 등등의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행동하는 실천에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이 아닌, 현재에 충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공정함이란 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지 않는 것이다(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믿음은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모습으로도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삶까지도 하느님 손에 맡기는 용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숨기지 않는 것이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시작입니다. 내어맡기는 것이 은총의 문을 엽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결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언제나 심판보다 앞서 작동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님을 믿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을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사람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서도 하느님께 다시 우리 삶을 맡기는 신뢰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흔들리는 이 하루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 손에 맡기는 믿음의 사람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죄인들의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입니다.
마태오복음 21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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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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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2/13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3 |
| 25/12/1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2 |
| 25/12/1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1 |
| 25/12/1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10 |
| 25/12/0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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