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가까이 계시나이다. 당신 계명은 모두 진리이옵니다. 당신이 영원하시기에, 일찍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깨달았나이다.
주님, 저희 마음을 일깨우시어 성자께서 오시는 길을 닦게 하시고 성자를 맞이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1,13-20)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오늘 복음
(마태 11,11-15)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사 41,13-20
오늘 제1독서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마태 11,11-15
오늘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1일
전진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2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낮추어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41,14) 벌레와 구더기라는 표현 자체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라는 말씀에서 그 표현들이 애틋한 사랑에서 나왔음을 알아차리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할머니나 엄마가 아기에게 볼을 비비면서 “아이구, 내 강아지! 내 새끼! 요 못난이!”라고 하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기에게 말할 때 스스로 아기가 되어 아기처럼 말하고 아기의 몸짓을 합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다가가면서 아기가 되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벌레 같은 야곱, 너는 작은 벌레 같은 존재, 아주 조그만 존재이지만. 나는 너를 많이 사랑한단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시고자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겸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구원자”(41,14)는 히브리 말로는 ‘고엘’입니다. 고엘은 살해당한 친족을 위하여 대신 복수하는 자(민수 35,19 참조), 과부의 보호자를(룻기 2,20 참조)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몸소 이 몫을 맡으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방식대로, 자신을 낮추는 겸양과 다정함과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다가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도 하늘나라 폭행자?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오심과 함께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셨는데, 세례자 요한이 주님과 하늘나라를 증언하니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며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개념 정리를 먼저 한다면 폭력을 쓰는 자들이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고, 하늘나라가 폭행당한다는 것은 이들에 의해 하늘나라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처럼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 권력자들이 왜 하늘나라 백성들을 폭행하는지 보게 됩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이 아무리 폭력을 좋아한다고 해도 괜히 폭행하겠습니까? 하늘나라 백성이 가만히 있는데도 폭행하겠냐는 말입니다.
권력자가 하는 짓이 하느님 뜻이 아니라고 하니 하늘나라 백성을 폭행하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 이뤄지는 하늘나라를 하늘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세우려고 하니, 그것을 자기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나라 백성을 폭행하는 겁니다.
제가 세상 권력자라도 그럴 것입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그래서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데 하느님 뜻대로 하라 하면, 또 이 세상은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하느님 나라라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폭력을 쓰는 자에 대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고, 내가 바로 폭력을 쓰는 자가 아닌지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 권력자가 아니니 폭력을 쓰는 자가 아니고,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힘을 가진 사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 힘을 가진 사람, 자기가 가진 힘을 내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폭력자입니다.
달란트를 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내게 힘을 주셨는데 그 힘을 하느님 뜻대로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아내에게 남편이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도 폭력자들입니다. 사랑이 없이 힘만 있을 때 가정 폭력이 일어나고 하느님 뜻대로 힘을 쓰지 않을 때 가정 폭력이 하늘나라 폭행입니다.
가정도 이러하니 단체 안에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하느님 뜻을 거스르겠다고 작정하고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다 보니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공동체를 결과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요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원장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구성원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진 힘을 하느님 주신 뜻대로 쓰지 않고 자기 뜻대로 쓰려고 하면 다 폭행자이고, 힘을 더 가진 사람보다 덜 가진 사람이 덜 자기 뜻대로 쓰는 차이일 뿐이겠습니다. 아무튼 나도 내 사는 곳에서 하늘나라 폭행자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 곧 ‘하늘나라’는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니 누가 더 큰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새 시대’, 곧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하늘나라’는 거부되고 배척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박해당하고, 또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하늘나라’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된 엘리야라면(말라 3,23; 집회 4-10 참조),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된 구세주’심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방치하거나 빼앗겨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한갓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겨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12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당신의 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우상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게 하소서.
세상이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고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호한 개념은 사랑받지만, 구체적 진리는 폭행을 부른다.
엘살바도르의 성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평화를 이루십시오라고 추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독재 정부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듣기 좋은 모호한 사랑 노래에는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구체적인 정의로 바꾸어 선포한 날, 상황은 변했습니다. 그는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사격을 중지하시오! 형제 살인을 멈추시오!"
이것은 모호한 권고가 아니라, 악을 정확히 지목한 명령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그는 미사를 집전하다가 제대 위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은 환영받지만, 구체적인 정의는 총알을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가 당하는 폭력"의 실체입니다. 진리가 모호할 때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진리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펴고 "바로 당신이 문제다, 지금 멈춰라"고 지목할 때, 세상은 그 입을 막기 위해 폭력을 휘두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극찬하십니다. 왜 그토록 칭찬하셨을까요?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 말씀은 비난이 아닙니다. 요한이 진리를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냈기에, 어둠 속에 있던 세상이 발작하며 하늘 나라(예수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지목했습니다. 또한 헤로데 왕의 죄를 향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이 적당히 두리뭉실하게 말했다면 그는 존경받는 원로로 늙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리를 구체적으로 지목했기에 그는 감옥에 갇히고 목이 잘리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하늘 나라가 세상의 표적이 되도록 만든 요한의 이 거룩한 용기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당하는 운명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분의 은총로운 말씀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책을 덮으시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포하시자 분위기가 돌변했습니다.
즉,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라고 진리의 실체를 드러내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동네 밖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옛날이야기 속의 메시아는 환영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서서 내 삶의 주권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메시아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고 했다면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불을 내려 참 하느님을 명확히 증명하고, "바알은 가짜다"라고 악을 지목했을 때, 이제벨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겠다"며 살의를 드러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경험도 그렇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이나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책을 통해 "우리도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신화 교리)"라고 가톨릭의 핵심 진리를 선포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거센 반대와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말이 너무나 명확하고 구체적이라서,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말이 너무 모호해서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날선 검과 같아서, 드러나면 반드시 어둠을 찌르게 되고, 찔린 어둠은 비명을 지르며 폭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폭력을 당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좋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대림 시기를 맞아 냉담 교우들을 방문하려 합니다. 만약 제가 성당 안에서 "냉담 교우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만 한다면 저는 안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형제님,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나오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호소한다면, 저는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욕설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가 당하는 폭행입니다. 하지만 그 폭행을 감수하고 초인종을 누를 때에만, 누군가는 구원됩니다.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보십시오. 그가 구약의 역사를 길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조용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에 "너희가 바로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인 자들이다!"라고 죄를 지목하자,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나 명확한 진리가 뼈아팠기에, 귀를 막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하게 하십시오. 점잖게 믿지 마십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선포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미움을 받는다면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가진 신앙이 모호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찌르는 진짜 빛이라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게으르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게을러서 공부하는 것을 미루는 것이고, 게을러서 운동하는 것을 미루고 있으며, 게을러서 기도하는 것을 미룬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따지면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뒤로 미룰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르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일에 게으를까요? 아마 이런 부분에서 게으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 가는 것에 게을러요.”, “저는 숨 쉬는 것에 게을러요.”
생존에 필요한 일에 게으르면 우리는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기에 절대로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결국 게으르다는 것은 자기가 하려는 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모두 이런 마음 때문에 미루는 게으름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기 존재 자체가 위험해 질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따르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당신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세상일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세상일이 먼저고 주님 일은 나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아직도 주님 일을 하기에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시간이 무한대로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주님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인물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와 율법을 마무리하고 메시아를 직접 가리킨 인물이기에 옛 계약안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이 새로운 질서에 속한 신앙인은(비록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이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구원의 실체를 소유하고 있기에, 신분상으로 요한보다 더 큰 은총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은총(성체성사, 하느님의 자녀 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거대한 특권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지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일을 미루고, 동시에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기에 급급합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의 시민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많은 은총을 받으면서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여정을 그만두는 것이 아닐까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사는 환경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가 바뀔 때 인생도 바뀐다(앤드류 매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오늘도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는 가장 큰 힘은 폭력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폭력은 하느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깊은 불의(不義)입니다. 하느님의 주권을 인간의 욕망의 질서 안에 집어넣는 모진 행위가 바로 폭력입니다. 하늘 나라는 힘을 통해 오지 않고, 내어맡기는 겸손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진실로 큰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의 위대함은 은총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늘 나라는 지배로 빼앗는 대상이 아니라, 내려놓음으로만 열리는 은총의 영역입니다.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폭력은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할 때 일어납니다. 하늘 나라를 내 방식으로 움켜쥐려는 것이 영적 폭력입니다. 잡으려 할수록 사라지고, 지배하려 할수록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메시아의 시대는 폭력의 종식으로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폭력과 지배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 안에서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폭력을 내려놓을 때 열리는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하늘 나라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비폭력은 서로를 살아나게 하는 가장 깊은 하늘 나라의 용기입니다.
이사야서 41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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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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